‹ 목록으로 짱형, 알고보니 딸 가진 엄마

2화

도준은 카운터 앞에 선 채로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방금 들은 말이 자꾸만 귓가에서 되풀이됐다. 짱형이... 여자였다고. 그것도 이 카페의 주인이었다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준은 그 떨림을 감추려고 주먹을 살짝 쥐었다 폈다. 여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앞치마를 다시 매만지며 물수건을 건넸다. — 앉아요. 놀랄 만하죠, 저도 알아요.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어조가 익숙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도준은 그 기시감의 정체를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도준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의자에 앉는 순간에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여자가 커피 두 잔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커피잔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두 사람 사이를 흐릿하게 갈랐다. — 정소영이에요. 게임에서는 남자로 위장했어요. 이유는... 그냥, 그게 편해서요. 소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도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 왜 남자인 척을... — 여자라고 하면 다들 반응이 달라지거든요. 실력을 봐주기보다 다른 걸 먼저 보고요. 소영이 웃었다. 웃음 속에 익숙한 피로가 스쳤다. 그 피로는 오래 쌓인 것처럼 보였다. 마치 수백 번은 같은 질문을 받아온 사람의 표정 같았다. 도준은 그 표정에서 순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짱형의 말투를 겹쳐 보았다. 무뚝뚝하면서도 다정한, 그 특유의 어조. 게임 중 실수를 저질러도 다그치지 않고 "다음엔 이렇게 해봐" 라고 짧게 던지던 그 말투. — 목소리... 그러고 보니. — 마이크로 변조했어요. 프로그램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 소영이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도준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그렇게 믿고 따랐던 존재가 사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속여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 그럼 지금까지 저한테 해준 조언들, 다 소영 씨가... — 네. 도준 씨 학교 얘기, 진로 고민, 다 기억해요. 도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동안 짱형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들이 하나씩 머릿속을 스쳤다. 친구가 없다는 것, 여자와 말을 못 섞는다는 것, 부모님과의 서먹함까지. 특히— 반에서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말 한 번 못 걸어봤다고 했던 그 밤의 대화까지. 도준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이야기를 이 여자가,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이 사람이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설마... 그것까지 다 알고 있는 건가.' 소영은 그 속마음을 짚어내듯 살짝 미소 지었지만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다행이라고 도준은 생각했다. 아니, 그게 다행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 근데 왜 갑자기 만나자고 하신 거예요. —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숨기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소영의 말투에는 미안함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도준은 그 말을 곱씹었다. 예의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다가왔다. 온라인에서 짱형으로 만난 사람과, 이렇게 오프라인에서 커피를 마주하고 앉은 상황 자체가 아직도 낯설었다. 카페 안은 조용했다. 창밖으로는 오후의 볕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원두 볶는 냄새가 은은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벽에 걸린 오래된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만 유독 크게 들렸다. 그때였다.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 엄마, 오늘 재고 정리 다 했어요. 앞치마를 두른 여학생이 상자를 든 채 걸어 나왔다. 긴 생머리, 하얀 얼굴, 또렷한 눈매. 도준은 그 얼굴을 아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다은. 한빛고 2학년, 같은 반. 학교에서 남학생들이 몰래 사진을 찍어대는, 그 유명한 미소녀. 도준과는 한 번도 말을 섞어본 적 없는 존재였다. 교실 맨 뒷자리에서 언제나 혼자 책을 읽던 도준에게, 다은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반 아이들이 수군거리며 그녀의 뒷모습을 훔쳐보던 모습, 급식실에서 지나갈 때마다 시선이 쏠리던 그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다은도 도준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상자를 든 손이 살짝 흔들렸다. — 너... 우리 반 애 아니야? 도준은 그 말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눈앞의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머리가 하얗게 비어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느껴질 정도였다. '짱형의 딸이... 우리 반 애였다니.' 머릿속에서 두 개의 세계가 충돌하는 느낌이었다. 온라인의 짱형, 오프라인의 정소영, 그리고 학교의 이다은. 이 세 존재가 하나의 가족 안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 도준의 상식을 뒤흔들었다. 소영이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은의 어깨를 감쌌다. — 소개할게. 우리 딸, 다은이야. 순간 카페 안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도준은 손에 든 컵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손끝에 남은 온기만이 유일하게 현실감을 붙잡아 주는 것 같았다. 다은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상자를 카운터에 툭 내려놓고 도준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경계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 엄마, 이 애가 왜 여기 있어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아졌다. 도준은 그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다은의 진짜 감정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교실에서 늘 무표정하게 지나치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 손님이야. 소영이 짧게 답했다. 다은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가 다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아... 그래요. 딱 그 말만 남기고 다은은 뒤로 돌아섰다. 하지만 카운터를 지나치던 걸음이 잠시 멈췄다. 뒤통수로 느껴지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도준은 그 짧은 침묵 사이에서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긴장을 느꼈다.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다은이 다시 걸음을 옮겨 뒷방으로 사라질 때까지, 도준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탁. 카페 안에는 다시 도준과 소영만이 남았다. 원두 냄새와 시계 소리, 그리고 방금 전 일어난 일에 대한 침묵만이 자리를 채웠다. 도준은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 이 카페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자신은 뭔가 되돌릴 수 없는 관계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것을. 소영이 다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는 오랜 시간 눌러온 걱정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 저 애가 좀... 남자를 많이 어려워해요. 그 말투에 담긴 무게가, 도준의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소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영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그 평온함 뒤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도준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남자를 어려워한다는 게... 무슨 뜻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영의 시선이 다은이 사라진 방문 쪽으로 다시 향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도준은 그 눈빛에서 단순한 걱정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읽어낸 것 같았다. 카페 안의 시계가 다시 째깍거리기 시작했다. 창밖의 볕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도준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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