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골목을 빠져나오자 소라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침 햇살이 낮게 깔려 있었다. 골목 끝, 감나무 그늘 아래로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걸음이 빨랐다. 도시락 통을 든 손이 꽉 쥐어져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뒤따라갔다.
발밑에서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다다닥.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소라야."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걸음이 더 빨라졌다.
"소라야, 잠깐만."
나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골목이 좁아서 발을 헛디딜 뻔했다. 벽에 손을 짚고 균형을 잡았다. 손바닥에 차가운 시멘트 감촉이 닿았다.
결국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소라가 그제야 멈춰 섰다. 돌아본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눈을 찡그렸을 텐데, 지금은 그런 게 없었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뭐."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미안해. 내가... 무슨 뜻으로 그런 게 아니었어."
"알아. 오빠는 늘 그런 뜻으로 하는 거 아니잖아."
소라가 팔을 뺐다. 그 순간 손끝이 스쳤는데,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히.
나는 잠시 멈칫했다.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 밑이 붉었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물어야 할지 말지 고민했던 것을, 결국 물었다.
"청목역. 매년 여름마다 갔었다고 들었어."
순간 소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정말로, 눈앞에서 색이 사라지는 걸 봤다. 입술이 하얗게 변했다.
"누가... 그런 얘기를 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메모 봤어. 방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워져 있었지만, 조금은 남아 있었어."
소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시락 통을 든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녀가 그걸 얼마나 세게 쥐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감나무 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기다린 거 아니었어."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냥... 확인만 했던 거야. 오빠가 진짜 안 온다는 거 확인하러."
"소라야."
"매년, 여름마다. 첫날 기차 오는 시간에 맞춰서."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데도 그녀는 웃으려 했다. 그 웃음이 부서지고 있었다. 입꼬리는 올라가는데 눈은 이미 젖어 있었다. "근데 오빠가 안 오니까. 그럼 됐다, 하고 돌아갔어. 다음 해도 똑같이. 6년 동안."
6년.
그 숫자가 머릿속에서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발밑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6년 동안 매년 여름, 같은 기차역에서, 같은 시간에, 나를 확인하러 갔다는 사실이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기다린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소라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제는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멈추지 않고. "근데 왜 자꾸... 왜 자꾸 그렇게 되냐고."
그녀는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도시락 통이 흔들리면서 안에서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달그락.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과의 말도, 위로의 말도 이 순간에는 다 가벼워 보였다.
그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돌아보니 은채와 하늘이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둘 다 우리 대화를 다 들은 눈치였다. 은채의 눈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쥔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하늘은 표정 없이 소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 그렇듯,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흔들리고 있었다.
"언니." 은채가 작게 불렀다.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있었다.
소라는 그제야 자신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듯, 입을 막았다. 손바닥으로 입술을 누른 채 잠시 숨을 골랐다. 어깨가 들썩였다.
"...신경 쓰지 마." 소라가 고개를 돌렸다. 애써 담담한 척하려는 목소리였지만 끝이 갈라졌다. "그냥 확인이었다니까."
하지만 그 말은 이제 아무에게도 통하지 않았다. 나에게도, 은채에게도, 그리고 아마 소라 자신에게도.
정적이 흘렀다. 골목에 서 있는 우리 네 사람 사이로 아침 바람이 지나갔다. 감나무 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저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한 번 들리다 곧 멎었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소라를, 소라는 바닥을, 은채는 소라를, 하늘은 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얽히고 풀리면서 침묵만 길어졌다.
"미안해." 내가 겨우 말했다. "진짜 미안해. 내가 그때 뭘 남기고 갔는지 몰랐어."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도 이게 얼마나 부족한 말인지 알았다. 6년이라는 시간 앞에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소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손목으로 눈가를 훔치는 동작이 어색하게 반복됐다.
"됐어. 오빠 탓 아니야." 그녀가 억지로 웃었다. 눈은 여전히 젖어 있었지만, 입꼬리만큼은 힘겹게 끌어올렸다. "그냥... 나 알바 늦어서 가야 돼."
그녀는 도시락 통을 다시 고쳐 쥐고 걸어갔다. 걸음이 아까보다 느렸다. 뒷모습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도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알게 된 기분이었다. 은채의 142번, 하늘의 6년치 기록, 소라의 매년 여름. 세 사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나를 기다려온 시간이 갑자기 눈앞에 쌓여 무너지듯 다가왔다.
142번. 그 숫자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놀랐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소라의 6년이 더해지자 그 숫자가 다시 무게를 갖고 짓눌러왔다. 각자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나를 향해 쌓여온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살아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는데도 머리는 텅 빈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돌려 걸었다. 마을 어귀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큰길을 지나 어딘가로.
등 뒤에서 은채가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오빠—"
그 목소리가 등 뒤에서 점점 멀어졌다.
숨이 막혔다.
그냥 걷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머릿속에는 오히려 더 많은 장면이 떠올랐다. 소라가 매년 여름, 기차역 플랫폼에 서서 도착 시간표를 확인하는 모습. 은채가 어딘가에서 숫자를 세며 하루하루를 넘기는 모습. 하늘이 조용히 어떤 기록을 남기며 나를 기다리는 모습.
나는 그중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눈이 시렸다.
걷다가 문득 멈춰 섰다. 발밑에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그림자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다시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