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역에서 집까지 가는 십 분 남짓한 거리가, 오늘은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저녁 무렵의 골목은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고, 발밑에서는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그 소리마저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은채는 내 오른팔에 팔짱을 끼고 걸었다. 팔에 닿는 체온이 뜨거울 정도였다. 다른 쪽에서는 소라가 걷다가 갑자기 내 왼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가방 들어줄게."
"아니, 괜찮아."
"괜찮은 거 아냐. 무겁잖아."
소라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내 배낭 손잡이를 잡아챘다. 은채가 즉시 반대편에서 손을 뻗었다.
"내가 들 거야."
"네가?"
소라의 눈썹이 올라갔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기운이 흘렀다.
배낭 손잡이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손이 부딪혔다. 누구도 먼저 놓지 않았다.
"소라야, 너 팔 아프잖아. 어제도 알바하고 왔다며."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 있지. 무리하지 마."
"내가 무리하는 게 그렇게 신경 쓰여?"
은채가 입을 다물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걸음을 멈췄다.
"둘 다 놔. 내가 들게."
"아니야, 오빠는 그냥 손 비우고 걸어."
"맞아. 도윤이는 그냥 편하게 걸으면 돼."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이상하게 그 말투마저 똑같았다. 6년이 지났는데도, 저 둘은 여전히 서로를 보는 눈빛만큼은 날이 서 있었다.
결국 배낭은 소라가 들게 됐다. 은채는 대신 내 팔을 더 세게 붙잡았다. 마치 그것으로라도 뭔가를 증명하려는 것처럼.
그리고 하늘은, 늘 그렇듯 몇 걸음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내 뒷모습을 보는 듯한 시선만 등에 꽂혔다.
한 번쯤은 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늘의 눈을 마주하는 게, 이상하게 더 어려웠다.
골목을 두 번 꺾고 나서야 익숙한 담벼락이 보였다. 낮은 기와지붕, 색이 바랜 파란 대문. 6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나만 이렇게 변했는데, 이 집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는 게.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진이 다 빠져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할머니가 부엌에서 나오셨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왔구나, 우리 도윤이."
할머니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조금 숨이 놓였다. 6년 전과 똑같은 목소리였다. 세월이 그대로 담긴 목소리.
"할머니..."
달려가 안겼다. 할머니의 몸이 예전보다 훨씬 작아졌다는 걸 그제야 느꼈다. 품에 안았는데도 뭔가 허전한 느낌. 예전에는 이렇게 작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할머니의 손이 내 등을 두드렸다. 느리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많이 컸구나. 목소리도 그렇고."
"할머니는... 좀 작아지신 것 같아요."
"늙으면 다 그렇지 뭐."
할머니가 웃었다. 그 웃음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동시에 서글퍼졌다.
"애들 다 와 있었구나."
할머니는 세 소녀를 보며 웃었다. 아무 이상한 것도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녁 먹고 가려고 왔어요."
은채가 냉큼 대답했다.
"저도요."
소라도 곧바로 말을 받았다.
하늘은 아무 말 없이 그냥 마루에 걸터앉았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그냥 걸터앉아서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런 하늘을 잠시 바라보더니, 별말 없이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저녁 식사 자리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찌개 냄비에서 뽀글뽀글 끓는 소리만 났다. 나는 밥그릇을 앞에 두고도 젓가락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몰랐다.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은채는 내 왼쪽, 소라는 맞은편, 하늘은 대각선 끝자리. 넷이 아니라 다섯이 앉은 것처럼 자리가 좁게 느껴졌다.
"오빠, 이거 좋아하지?"
은채가 계란말이를 내 앞으로 밀어줬다. 노릇하게 잘 부쳐진, 완벽한 모양이었다. 자른 단면이 촘촘하게 말려 있었다. 누가 봐도 여러 번 연습한 흔적이었다.
"...고마워."
"내가 만든 거야."
"어, 그래?"
"몇 번 만들었는지 알아?"
은채의 눈빛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연습 많이 했어. 오빠 좋아하는 맛으로."
숨이 턱 막혔다. 6년 전, 내가 계란말이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던 게 기억났다. 별거 아닌 한마디였는데. 그걸 6년 동안 기억하고, 연습까지 했다는 말인가.
그 말에 소라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그런 거 굳이 말해야 돼?"
"내가 왜 말하면 안 돼?"
은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실 말하는 거잖아."
"자랑 아니면 왜 저렇게 말해."
"넌 뭐 안 그랬어? 오빠 좋아하는 거 다 알아서 그러는 거잖아."
"둘 다 조용히 해."
할머니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한마디에 두 사람 다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냄비 끓는 소리만 다시 방 안을 채웠다. 나는 그냥 밥을 씹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계란말이는 분명 맛있었다. 그런데 목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은 밥을 거의 먹지 않고 있었다. 그냥 젓가락으로 밥알을 뒤적이기만 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식사가 끝난 뒤, 은채와 소라는 각자 다른 이유로 조금 더 앉아 있으려 했다. 은채는 설거지를 돕겠다며 부엌으로 갔고, 소라는 할머니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두 사람 다, 내 옆이 아니라 할머니 곁에 있으려는 것 같았다. 마치 할머니에게 잘 보이는 게 나에게 가까워지는 길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하늘은 벌써 마당에 나가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도윤아."
할머니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웠다.
"잠깐 나와봐라."
마당으로 나갔다. 저녁 공기가 차가웠다. 하늘은 담벼락 근처에 서서 별을 보고 있었다.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어 있었다. 추운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할머니는 나를 이끌고 조금 더 걸어갔다. 세 사람에게서 거리가 벌어진 곳까지. 마당 끝, 감나무 아래였다. 예전에 여기서 여름밤이면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별을 보곤 했던 자리.
"할머니, 무슨 일이에요?"
할머니는 대답 없이 잠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눈빛에 걱정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그 눈빛이 낯설었다. 예전엔 이런 눈으로 나를 본 적이 없었는데.
"도윤아."
"네."
"너, 저 애들이 어떤 마음으로 6년을 살았는지 아니?"
순간 말이 안 나왔다. 심장이 이상하게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 한숨이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여자아이의 6년은, 남자 6년이랑 달라."
그 말이 이상하게 무겁게 들렸다.
"너는 6년 동안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저 애들은, 6년 동안 너 하나를 기다리면서 어른이 됐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게 무슨..."
"넌 그동안 뭘 하며 살았니. 공부하고, 친구 사귀고, 그렇게 지냈겠지. 그런데 저 애들은 매일 이 집에 왔다. 방학도 없이, 명절도 없이. 네가 언제 오나, 그것만 기다리면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소라는 알바를 세 개나 하면서도 여기 오는 걸 빼먹은 적이 없다. 은채는... 은채는 말을 안 해서 모르겠다만, 그 애 눈빛을 보면 알지. 하늘이는, 그 애는..."
할머니가 말을 멈췄다. 뭔가 더 하려던 말을 삼키는 것 같았다.
"하늘이는 왜요?"
"그건 네가 직접 봐야 할 거다."
심장이 다시 쿵, 소리를 냈다.
"할머니, 조금 더 말씀해주세요."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오늘은 그냥 자거라."
"할머니..."
할머니는 뒤돌아서 걸어가며, 낮게 말했다.
"너 방에, 네가 확인해봐야 할 게 있을 거다."
그 말만 남기고 할머니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뒷모습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마당 저편에서 하늘의 시선이 여전히 등에 꽂혀 있는 게 느껴졌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방에 뭐가 있다는 거지.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저렸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 하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다는 불안함이 목을 조여왔다.
부엌 창문 너머로 은채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라와 할머니가 나누는 대화 소리도 들렸다. 평온한, 너무나 평온한 저녁이었다. 그런데 왜 나만 이렇게 불안한 걸까.
나는 천천히 내 방으로 향하는 마루를 밟았다. 나무 바닥이 삐걱, 낮게 울렸다. 그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방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렸다.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