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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아침이 왔는데도 나는 눈을 감고만 있었다. 창밖이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빛이 눈꺼풀 위에서 붉게 번졌다. 나뭇가지가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는 어느샌가 멈춰 있었다. 밤새 바람이 잦아든 모양이었다. 서랍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향했다. 나무 표면에 남은 손잡이의 흠집까지 눈에 익어버렸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면서도, 나는 다시 열어볼 자신이 없었다. 어젯밤 그 노트를 펼쳤을 때 손끝이 떨리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종이 냄새, 잉크 자국, 그리고 숫자. 142. 숫자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듯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아래층에서 그릇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 할머니가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였다. 익숙한 소리인데도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잠들지 못한 눈이 뻑뻑했다. 눈꺼풀이 모래를 문지른 것처럼 뻣뻣하게 움직였다. 세수를 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마치 시험장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발끝이 계단 하나를 밟을 때마다 아래층의 온도가 다르게 느껴졌다.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프라이팬 소리와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부엌에는 이미 세 사람이 있었다. 은채가 프라이팬 앞에 서 있었다. 어제와 같은 자세였다. 하얀 원피스는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간 건 그대로였다. 계란을 뒤집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노란 계란말이가 조금씩 모양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접시가 미리 놓여 있었다. 내 몫이라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라는 식탁에 앉아 도시락통을 정리하고 있었다. 세 개나 되는 통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뚜껑을 하나씩 닫는 손짓이 평소보다 빨랐다. 서두르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참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알바 가야 돼서." 소라가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오빠 몫도 하나 있어." 그러곤 통 하나를 내 쪽으로 쓱 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받았다. 통은 따뜻했다. 방금 만든 거라는 뜻이었다. "이건 뭐야." "주먹밥. 못 먹으면 버려도 돼." 소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눈은 나를 힐끗 살피고 있었다. 그 짧은 시선 안에 뭔가가 실려 있었다. 기대인지, 경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 은채가 프라이팬을 탁, 내려놓았다. 소리가 예상보다 컸다. 부엌 안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할머니는 싱크대 앞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조용히 접시를 헹구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듯 무언의 선언 같았다. "오빠 아침은 내가 준비했어." 은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와 똑같은 계란말이가 접시 위에 올라가 있었다. 노란 색감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소라 언니 도시락은 나중에 먹어도 되잖아." "먼저 온 사람이 먼저지." "오빠가 뭘 먹을지는 오빠가 정하는 거잖아." "그럼 정하라고 해." 소라가 도시락 뚜껑을 탁 닫으며 말했다. 그 소리가 은채의 프라이팬 소리와 묘하게 겹쳐 부엌 안에 울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식탁 위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나는 그 사이에 우두커니 서서 어느 쪽도 먼저 집을 수 없었다. 손에 든 도시락통이 점점 뜨겁게 느껴졌다. 아니, 뜨거운 건 통이 아니라 내 손바닥이었다. 하늘은 구석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만 조용히 나에게 고정돼 있었다. 어제 저녁과 똑같은 눈빛이었다. 관찰하듯, 기록하듯. 숟가락을 든 손은 멈춘 채였다. 마치 이 장면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것처럼.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폐 안 가득 부엌의 공기가 들어왔다. 계란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냄새였다. 그리고 그릇 두 개를 다 식탁 중앙으로 옮겼다. "같이 먹자." 내가 말했다. "계란말이도 먹고, 주먹밥도 먹고. 둘 다 먹으면 되잖아." 순간 침묵이 흘렀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할머니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낮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 소리조차 이 정적을 덮지 못했다. 은채의 눈이 흔들렸다. 접시를 쥔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소라는 입술을 살짝 비틀며 웃었지만, 그 웃음에 날카로운 게 섞여 있었다. 마치 웃음이 아니라 참는 표정 같았다. "역시 오빠는." 소라가 중얼거렸다. "항상 그렇게 다 똑같이 대하려고 하지." "소라야." "됐어." 소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게 울렸다. 그 소리가 유난히 길게 이어졌다. "먹어. 난 늦었어." 소라는 도시락 두 개를 챙겨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문을 여는 손짓이 평소보다 세게 느껴졌다. 쾅. 대문 닫히는 소리가 마당까지 울렸다. 새 한 마리가 그 소리에 놀라 나뭇가지에서 날아올랐다. 부엌엔 정적만 남았다. 은채는 접시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란말이는 이제 다 식어가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지켜보는 눈빛으로. "저기, 은채야."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노트에 대해서..." 은채의 몸이 살짝 굳었다. 프라이팬을 쥐고 있던 손이 슬며시 내려갔다. "오빠가 봤어?"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 대신 침묵이 답이 되어버렸다. 침묵이 이렇게 무거운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채의 눈에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이 유리에 살짝 반사됐다. "142번이었어." 은채가 낮게 말했다. "오빠가 나한테 절대 안 버린다고 말한 거. 그거 세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은채야..." "괜찮아." 그녀가 애써 웃었다. 그 웃음이 오히려 더 아프게 느껴졌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오빠 탓 아니야. 내가 그냥... 세고 싶었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손에 든 도시락통의 온기가 점점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때 하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짧고 낮은 소리였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하지만 그 눈 속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결심 같은 것. 평소라면 그저 지켜보기만 하던 그 눈빛이, 지금은 나를 어딘가로 밀어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소라 언니 쫓아가는 게 좋을 거야." 하늘이 말했다. "오늘 안 가면 늦어." "뭐가?" 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가리켰다. 마당 너머, 골목 어귀로 소라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이 눈에 들어온 순간, 다른 생각은 다 사라졌다. 은채의 눈물도, 노트의 숫자도, 하늘의 알 수 없는 표정도 전부 뒤로 밀려났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신발을 신고 뛰어나갔다. 신발 뒤축을 제대로 구겨 신을 틈도 없었다. 등 뒤에서 은채와 하늘의 시선이 나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무엇을 쫓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냥 달렸다. 골목 어귀를 돌아설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소라의 뒷모습은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지만, 동시에 점점 더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발걸음을 늦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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