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하렘엔딩만은 막기로 했다

2화

다음 날 아침, 등굣길 내내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재구성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강민준과 이나은의 플래그가 지금쯤 얼마나 진행됐는지, 윤채영이 도서실 이벤트를 언제 트리거하는지, 한다솔의 타락 시점이 언제였는지, 서지원의 등장 타이밍이 어떻게 되는지. 게임 텍스트 기억은 파편적이었지만 대략적인 순서는 남아 있었다. 노선표가 있으면 뭐든 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나는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정류장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는 십 분 동안, 나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표를 그려가며 계획을 짰다. 이나은 루트 안정화, 윤채영 접근 차단, 한다솔 모니터링, 서지원 대비. 순서만 지키면 될 거라고 믿었다.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는 그날 오후가 되기 전까지는 몰랐다. 첫 번째로 손댈 곳은 이나은 루트였다. 안전 루트라 불리던 만큼, 여기서부터 다잡으면 강민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게임에서도 이나은 루트는 가장 예측 가능한 전개로 흘러갔었고, 다른 루트에 비하면 변수도 적었다. 여기서부터 판을 짜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정리될 거라는 게 내 시나리오의 핵심이었다. 점심시간, 나는 급식실 구석에서 강민준을 발견했다. 사교성 좋다는 게임 설정 그대로, 그는 여러 무리와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식판을 들고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인기 많은 캐릭터라는 게 느껴졌는데, 문제는 그 인기가 지금 이 순간에는 나한테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야, 강민준."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게임 속 이도현의 목소리는 원래 그런 건지 위협적으로 갈라져 나왔다. 목젖이 이상하게 울렸다. 내 목이 아니라 남의 목을 빌려 쓰는 기분이었다. 강민준이 흠칫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식판을 든 손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어, 어... 도현이 형?" 형. 나이 차이가 있었나 보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변 애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비켜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이나은이랑 친하다며. 잘해줘라." 의도는 단순했다. 강민준이 이나은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도록, 아주 은근하게 밀어주려던 것이었다. 나는 이 정도면 충분히 자연스러운 개입이라고 생각했다. 게임에서도 조력자 캐릭터들이 이런 식으로 힌트를 던져줬으니까. 그런데 강민준의 표정이 예상과 다르게 굳었다. 얼굴색이 한 톤 어두워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형이 왜 그런 걸..." 목소리에 경계심이 뚝뚝 묻어났다. 뒤로 한 발짝 물러서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아, 조졌다. 게임 속 이도현이라는 캐릭터는 애초에 강민준에게 '위협적인 선배'였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상기했다. 저 자식 눈에는 지금 내가 자기 여자관계에 개입하려는 불량 서클 짱대가리로 보이는 것이었다.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잘못 짚었다, 완전히 잘못 짚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나는 어색하게 자리를 떴다. 등 뒤로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급식실을 나오면서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뭔가 크게 어긋났다는 걸. 그날 오후,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강민준] 야 이도현 형이 나은이 얘기 꺼냈어 [친구1] 헐 왜? [친구2] 설마 나은이 좋아하는거 아냐? [강민준] 몰라 소름끼침 [친구1] 그 형 원래 좀 그렇잖냐 [친구2] ㅋㅋㅋ 나은이한테 말해줘야하나 [강민준] 하지마 괜히 일 커짐 나는 우연히 옆 반 아이가 스마트폰으로 그 채팅을 보여주는 걸 목격했다. 안면 근육이 저절로 굳었다.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이 미끄러질 뻔했다. '그 형 원래 좀 그렇잖냐'라는 문장이 눈에 콱 박혔다. 원래 좀 그런 형. 도대체 이도현이 평소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 건지, 게임 텍스트 어디에도 그런 디테일은 없었다. 캐릭터 소개란에는 '냉철하고 계산적인 선배'라고만 적혀 있었는데, 현실에서는 그 냉철함이 소름 끼치는 위협으로 번역되고 있었다. 의도는 이나은과 강민준을 붙여주려던 거였는데, 결과는 강민준이 이나은을 의식적으로 피하게 만든 꼴이었다. 실제로 그날 이후 며칠간, 강민준은 이나은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일부러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까지 목격했다. 플래그가 오히려 역행하고 있었다. 미친, 이게 뭐야. 게임 지식으로 대충 찔러보면 술술 풀릴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게 순진하게 굴러가지 않았다. 나는 벤치에 앉아 핸드폰 화면을 몇 번이나 다시 열어봤다. 채팅은 지워지지 않았고, 소문은 이미 학년 전체로 번진 뒤였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세계에는 게임 시나리오와는 별개로, 내가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변수들이 존재한다는 걸. 강민준이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이도현이라는 캐릭터가 평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 축적된 관계의 무게가 내 개입 하나로 뒤틀린다는 걸. 게임은 텍스트로만 존재했지만, 이 세계는 사람들의 기억과 인상까지 포함한 전체였다. 첫 번째 실수. 강민준의 신뢰를 얻지 못한 채 개입했다. 두 번째 실수. 이도현의 평판을 파악하지 못한 채 움직였다. 세 번째 실수. 게임 지식만으로 현실을 재단하려 했다. 세 가지가 겹치니 이렇게 완벽하게 역효과가 났다. 불운은 성실함을 배신했다. 그날 밤, 나는 옥상에 올라가 담배 대신 캔커피를 까고 앉아 시나리오를 다시 곱씹었다. 차가운 캔이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그나마 정신을 붙잡아줬다. 게임 지식만으로는 안 된다. 이 몸이 가진 '이도현'이라는 캐릭터의 평판과 관계망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 손짓 하나하나가 오히려 파국을 앞당길 수도 있었다. 캔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다음부터는 무작정 들이대지 말고, 이도현이라는 캐릭터가 반에서, 학교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누가 나를 무서워하는지, 누가 나를 편하게 여기는지, 그 지도를 그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이렇게 하나하나 다 다시 배워야 하나? 그런데 옥상 계단 아래에서, 낯익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다솔이었다. 나는 순간 캔커피를 든 손을 멈췄다. 그리고 그 옆에는, 게임 CG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육상부 선배로 보이는 체격 좋은 남자애가 한다솔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고, 나는 그 순간 한다솔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 그 밑에 깔린 건 순수한 공포였다. 나는 계단 난간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숨을 죽였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저 장면, 게임에서 본 적 없는 조합이었다. 육상부 선배라는 설정 자체가 내가 아는 시나리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변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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