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유리창 너머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고,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함성이 아득하게 멀어져 들리는 와중에도, 서아의 귓속에는 오직 하늘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남아 맴돌고 있었다. 하늘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장난이었다고 계속 그러는데, 진짜 장난이었으면 애초에 벌칙 게임 걸릴 확률 계산까지 하면서 그렇게 신경 쓰지도 않았을걸." 하늘이 팔짱을 끼며 서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봐, 너 옥상에서 그 말 할 때 진짜였지."
"몰라." 서아가 낮게 내뱉었다. "모르겠다고."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서 도망치는 거잖아, 지금." 하늘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기가 사라지고 진지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너 그거 알아? 도윤이 반톡에서 완전 웃음거리 됐다는 거, 근데 걔는 그 이후로 한 번도 억울하다는 말 안 했어. 그냥 조용히 사라졌지. 그게 더 무서운 거야."
서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늘의 말이 가슴 깊은 곳을 정확히 찔러왔기 때문이었다. 목 안쪽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는데, 그게 억울함인지 후회인지조차 스스로도 구별할 수 없어서, 서아는 그저 입술을 꾹 다물고 창밖의 흐릿한 풍경에 시선을 고정시킬 뿐이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마음속으로 되물었지만, 곧바로 다른 목소리가 그 질문을 짓눌러 왔다. '아니, 알잖아. 너도 알잖아.'
그 주 월요일, 담임교사는 조회 시간에 종이 한 장을 들고 교실에 들어와 새로운 조 편성표를 공지했다. "이번 학기 과학 탐구 프로젝트, 4인 1조로 진행할 거고, 조는 제가 랜덤으로 배정했어요. 발표는 두 달 뒤니까 미리 준비들 잘 해놓고." 아이들 사이에서 낮은 탄식과 웃음이 뒤섞여 터져 나왔고, 몇몇은 벌써부터 옆자리 친구의 팔을 붙잡고 제발 같은 조이길 바란다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칠판에 붙은 명단을 확인하러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갔고, 서아도 자신의 이름을 찾아 시선을 옮기다가, 같은 조 명단에 적힌 이름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손끝이 순간적으로 차가워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강도윤. 윤서아. 한소율. 그리고 임하늘.
네 사람의 이름이 같은 줄에 나란히 적혀 있었다. 서아는 그 글자들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몰랐다. 혹시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서, 눈을 깜빡이며 다시 확인했지만 명단은 변하지 않았다.
도윤도 뒤늦게 명단을 확인하고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스친 표정을 서아는 놓치지 않았는데, 그건 짜증이나 곤란함이 아니라, 오히려 서늘한 무감정이었다. 마치 예상하고 있던 결과를 재확인한 사람의 얼굴 같아서, 서아는 그 무표정함이 차라리 화를 내는 것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다.
"운도 지지리 없네." 하늘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야, 이거 담임이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 우리 반에서 제일 시끄러운 조합으로만 딱 골라서."
소율은 별다른 대꾸 없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줄을 손끝으로 짚어보다가, 서아 쪽으로 슬쩍 눈길을 돌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시선 속에 담긴 게 동정인지 경계인지 서아는 가늠할 수 없었다.
방과 후, 도서관 열람실 구석에 모인 네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그 좁은 테이블 위로, 소율은 담담하게 자료 파일을 펼쳐 들었고, 하늘은 애써 분위기를 풀려는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지만, 도윤과 서아 사이의 냉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누군가 재채기라도 하면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릴 것만 같은 정적이었다.
"주제는 뭘로 할까." 소율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어." 도윤이 짧게 대답했다. 서아를 향한 시선은 여전히 없었다.
서아는 그 무심한 대답을 들으며, 목 안쪽이 조여드는 답답함을 느꼈다. 지난 며칠간 억울함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속에, 어느 순간부터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이 슬며시 스며들고 있었다. 그건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상실감이었는데, 서아는 그 감정의 이름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려 했다.
하늘이 눈치를 살피며 억지로 화제를 이어갔다. "그럼 우리 생태계 쪽으로 갈까? 아니면 에너지? 나 사실 뭐가 됐든 발표만 안 시켜주면 상관없는데."
"발표는 조원 전체가 다 하는 거야, 임하늘." 소율이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아, 진짜? 나 그럼 아파서 결석해야겠다." 하늘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서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도윤의 옆얼굴을 몰래 바라보았다. 그가 소율과 나누는 자연스러운 대화, 자신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 편안한 표정 — 그 모든 것이 예전엔 자신만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내가 뭘 잃었는지, 이제야 알겠어.' 손끝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매만지며, 서아는 그 생각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회의는 결국 큰 진척 없이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소율이 자료 몇 개를 나눠주며 각자 조사해올 부분을 정해주었고, 하늘은 그 자리에서 곧장 필기를 마치고 짐을 챙겼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도윤이 자료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서아가 낮게 그를 불렀다.
"도윤아, 잠깐만."
도윤은 걸음을 멈추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뭔데."
그 짧은 두 글자가 서아의 가슴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말투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명치 어딘가가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서아는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나…… 진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서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번엔 진심이야."
도윤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짧은 침묵 속에서 서아는 그가 대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어 심장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도서관 특유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도윤의 등이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서는 그 순간, 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