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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 무렵 소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도윤이 서아에게 품고 있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그 마음이 언젠가 이런 방식으로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마치 오래전부터 예감해 온 일처럼, 소율은 도윤의 눈빛이 서아를 향할 때마다 스치는 그 특유의 온도를 셀 수 없이 봐 왔었고, 그 온도가 식지 않는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소율은 도윤, 서아와 함께 셋이서 붙어 다니는 사이였는데, 어느 여름날 도서관 창가에서 도윤이 서아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담긴 미묘한 온도를 알아차린 순간부터, 소율은 스스로 그 자리에서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그날의 볕이 유난히 뜨거웠던 것도, 창가에 나부끼던 커튼 자락이 유독 눈에 밟혔던 것도, 소율은 아직까지 잊지 못했다. 셋 중 누구도 그 결심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소율은 그 이후로 도윤과 서아가 함께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명치 아래가 조용히 조여드는 감각을 견뎌야 했고, 그 감각을 삼키는 법을 스스로 익혀나갔다. 처음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는 것으로 버텼고, 나중엔 아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습관이 붙어버렸다. 그녀가 물러난 건 도윤을 위해서였다. 자신이 곁에 있으면 도윤이 서아에게 다가가는 데 방해가 될 거라는 생각, 그리고 무엇보다 도윤이 원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린 탓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떤 모양인지도 제대로 배우기 전에, 소율은 이미 짝사랑의 뒷모습부터 알아버린 셈이었다. 그렇게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소율은 멀찍이서 그를 지켜보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했다. 복도 저편에서 스치듯 보이는 옆얼굴 하나로 하루를 버텼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애써 무심한 척 시선을 돌리는 연습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런데 지금, 화단 벤치에 홀로 앉아 어깨를 떨고 있는 도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소율의 안에서 오래 눌러왔던 무언가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늘 반듯하게 펴져 있던 그 등이 오늘은 유독 구부러져 있다는 걸, 그리고 그 구부러진 등이 무너지지 않으려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소율은 그렇게 생각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스스로 정해둔 거리를 넘어서기로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지켜보기만 하던 시간은 이제 그만두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마음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었다. * * * 다음 날, 소율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도윤의 반 앞을 지나가다가, 마침 혼자 복도를 걷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자연스럽게 옆에 다가섰다. 심장이 유난히 크게 뛰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의 속도를 맞췄다. "오랜만이다." 소율이 먼저 말을 건넸다. 도윤은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소율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소율아?" "우산 안 챙겼지, 오늘 오후에 비 온대." 소율이 가방에서 작은 접이식 우산을 꺼내 도윤에게 내밀었다. "하나 더 있어서." 도윤은 얼떨결에 우산을 받아 들며, 몇 년 만에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그 어색함 속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놓이는 걸 느꼈다. 손끝에 닿은 우산의 손잡이가 낯설면서도 왜인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고마워." 도윤이 짧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소율은 옅게 웃으며 몸을 돌려 걸어갔고, 도윤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날 오후, 정말로 비가 내렸을 때 도윤은 우산을 펴며 소율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는 걸, 그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소율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도윤의 곁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매점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빵을 나눠 먹었고,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나란히 앉아 각자 다른 책을 읽었으며, 특별히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 침묵조차 도윤에게는 이상하게 편안하게 느껴졌다. 소율은 도윤이 좋아하는 딸기 우유를 기억해 두었다가 매점에서 마주칠 때마다 은근슬쩍 그것을 고르는 척했고, 도윤은 그런 우연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그 다정함에 조금씩 마음을 놓았다. 한편 그 모습을 창가에서 우연히 지켜본 서아는, 도윤과 소율이 나란히 매점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며 가슴 한쪽이 이유 없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무의식적으로 꾹 눌러 쥐었다가, 그 힘이 너무 세다는 걸 깨닫고서야 손을 풀었다. '뭐야, 저건.' 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가, 곧바로 스스로에게 놀라 고개를 저었다. 도윤을 향한 감정이 자신에게 남아 있을 리 없다고, 그저 오래된 친구를 신경 쓰는 것뿐이라고 되뇌었지만, 그 되뇜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들렸다. 내가 왜 이러지. 서아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고, 그 질문이 반복될수록 마음속 불안은 오히려 더 짙어졌다. 그날 하늘은 서아의 옆자리에 앉아 그 시선의 끝을 눈치채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늘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이미 확신이 섞여 있었다. "서아야, 너 설마." "뭐가." 서아가 애써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 목소리는 평온한 척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도윤이 좋아했었지. 처음부터." 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매점 앞, 도윤과 소율이 함께 웃고 있는 그 장면이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고, 서아는 그 겹쳐진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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