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복도 끝,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계단참에는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스며들어 먼지 알갱이들을 하나하나 비추고 있었는데, 그 정적을 깨듯 서아가 도윤을 붙잡았다. 가방을 메고 무심히 지나가려던 도윤의 팔을 서아가 손끝으로 붙잡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는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그 얼굴 위에는 아무런 동요도 비치지 않았다. 마치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매끈하게 정돈된 표정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 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녀 스스로도 그 떨림을 감추려 애써 턱을 치켜들었다. "그냥 벌칙 게임이었잖아. 장난이었을 뿐인데, 왜 그렇게 사람을 없는 것처럼 취급해?"
도윤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서아의 얼굴을 훑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어떤 풍경을 응시하는 것처럼 멀고 아득했는데, 그러다 낮게 되물었다.
"장난이었다고?"
"그래, 장난이었어. 미안하다고, 사과할게, 몇 번을 더 해야 돼?" 서아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들었다. 며칠째 반복되는 이 냉담함이, 그녀가 아는 도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기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과." 도윤이 그 단어를 그대로 반복하며 짧게 웃었는데, 그 웃음에는 조금의 온기도 담겨 있지 않았고 오히려 서늘한 바람이 스치듯 지나가는 느낌만 남겼다. "사과 받으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
"그럼 뭐야, 대체 뭘 원하는 건데?" 서아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며 억눌러왔던 감정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계단참의 좁은 공간에 그녀의 목소리가 부딪히며 울렸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예전처럼 돌아가는 거야?"
"예전처럼?" 도윤은 그녀의 말을 다시 그대로 되받으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숨소리에는 웃음도, 한숨도 아닌 애매한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그런 건 없어. 나한테 너는 그냥 그날, 옥상에서 끝났어."
서아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굳었다. "……뭐?"
그녀는 그 순간을 떠올리려 했지만, 정작 그날 옥상에서 있었던 일의 구체적인 장면들은 뭉개진 채로 흐릿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그저 벌칙 게임의 연장선이었다고 여겼던 그 순간이, 도윤에게는 전혀 다른 무게로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너한텐 게임 하나였겠지만, 나한텐 아니었으니까." 도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건조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만은 서아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돌덩이 하나가 그 짧은 문장 안에 통째로 얹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근데 그게 뭐가 중요해. 이미 다 끝난 얘기잖아."
"도윤아, 나는……" 서아가 무언가 더 말을 이으려 했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사과를 해야 하는 건지, 해명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이 상황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건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할 말 있으면 다음에 해." 도윤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몸을 돌렸다. "나 갈게."
그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계단을 내려가는 도윤의 뒷모습을, 서아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바라보았다. 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하나씩 멀어질 때마다, 그녀의 가슴 한켠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정작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그녀 자신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억울함과 당혹감이 뒤섞인 눈빛이었지만, 그 안에 미세하게 자리한 다른 감정 —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서늘한 불안 — 은 아직 낯설기만 했다.
'……미쳤네, 진짜.' 서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는 거야. 그냥 장난이었을 뿐인데.'
하지만 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도, 도윤이 남기고 간 그 마지막 말 — 옥상에서 끝났다는 그 말 — 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서아는 결국 입술을 깨물며 그 자리에 잠시 더 서 있다가, 느릿하게 돌아서서 반대편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도윤은 계단을 다 내려와 건물 뒤편 인적 없는 화단 앞에 다다르자마자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까지 유지하고 있던 그 냉정한 표정이,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순간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한순간에 끊어지듯, 얼굴의 근육 하나하나가 힘을 잃고 흘러내렸다.
손끝이 떨려왔다. 숨이 가슴 안쪽에서 턱턱 걸리며, 목구멍 너머로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도윤은 화단의 낮은 화강암 턱을 손으로 짚으며 잠시 균형을 잡았는데, 그 손끝의 냉기가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현실감을 일깨워주는 유일한 감각이었다.
'괜찮아.' 도윤은 스스로에게 되풀이해 말했다. '이제 진짜 괜찮아.'
하지만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10년을 쌓아온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하루 만에 얼음처럼 굳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서글펐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아온 감정의 층위들이, 옥상에서의 그 하룻밤으로 완전히 뒤집혀버렸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나만 아팠던 걸까.' 도윤은 생각했다. '나만 그날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화단 옆 벤치에 힘없이 주저앉은 도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며, 그 좁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건물 모퉁이 뒤에서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던 한소율이 조용히 목격하고 있었다.
소율은 원래 다른 용무로 그 화단 앞을 지나가던 참이었는데, 벤치에 앉은 도윤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버렸다. 평소 같으면 장난스럽게 다가가 어깨라도 두드렸을 텐데, 지금 저 떨리는 어깨를 보고 있자니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소율은 차마 다가가지 못한 채, 숨죽인 채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에 쥐고 있던 음료 캔이 손바닥 안에서 미끄러질 듯 차갑게 식어가는데도, 그녀는 그것조차 느끼지 못한 채 오직 도윤의 뒷모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단단하던 사람이, 언제나 웃음으로 모든 걸 넘기던 그 사람이 저렇게 무너져 있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기에, 소율의 가슴 한복판에도 낯선 통증이 번지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소율은 속으로 되뇌며, 발끝을 화단 모퉁이에 붙인 채 그 자리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