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경맥 3개, 하룻밤의 도약

2화

황 장로는 그날 시험을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평소라면 세세하게 이어졌을 후속 확인 절차마저 건너뛴 채였다. 시험장을 정리하던 문도들의 손길이 유난히 빨랐고, 그들의 눈빛에는 당황과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조금씩 달라졌다는 걸, 나는 그 순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승급 심사 결과는 발표되지 않았다. 대신 나는 별관의 작은 처소로 옮겨졌다. 감시인지, 배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조치였다. 방은 좁았다. 낡은 목재 냄새와 마른 풀 향이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창은 하나뿐이었고, 창틀 너머로 본관 쪽 지붕이 어렴풋이 보였다. 문을 지키는 문도 하나가 처소 앞에 늘 서 있었다. 그가 감시자인지 호위인지, 나로서는 판단할 근거가 부족했다. 문파의 소문은 빨랐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청림문 전체에 내 이야기가 퍼졌다. "백정호가 열두 경맥을 한 번에 열었다더군." "색공자가? 헛소리 말게." "직접 본 사람이 스무 명이 넘는데 헛소리라니." "난 그 자리에 있었네. 그 청년의 눈이, 마치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았어." 나는 처소 문틈으로 그런 대화를 들으며, 이 세계의 구조를 하나씩 정리했다. 목소리들은 문 앞을 지나칠 때마다 조금씩 낮아졌다가, 멀어질 때 다시 커졌다. 누군가는 내 이름을 두려운 듯 발음했고, 누군가는 흥미로운 구경거리처럼 취급했다. 그 온도 차가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무림에는 크고 작은 문파가 수백 개. 그중 상위권을 차지하는 십대문파가 있고, 그 아래로 수많은 중소문파가 세력을 다투었다. 청림문은 중소문파 중에서도 중간쯤 위치였다. 힘의 크기가 곧 발언권이 되는 세계. 그리고 그 힘의 근원은 예외 없이 경맥과 진기였다. 문파의 서열이 곧 그 문파가 배출한 고수의 숫자와 직결되고, 고수의 숫자는 다시 얼마나 많은 제자가 경맥을 온전히 개방했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러니 경맥을 스스로 통제하는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이토록 빠르게 퍼지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그 시스템을 불러냈다. 격자무늬 지도. 열두 정경과 기경팔맥. 게임 속에서 내가 설계했던 구조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칸마다 흐릿하게 빛나는 선들이 몸속의 실제 경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스킬 트리를 짜듯 노드를 클릭하면 진기가 흐르고, 막힌 혈이 뚫리는 감각이 뒤따랐다. 다만 이곳에서는 그것이 코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몸의 일부였다. 게임에서는 잘못 설계해도 리트라이 버튼을 누르면 그만이었다. 여기서는 그럴 수 없었다. 실패하면 죽는다. 그 사실이 묵직하게 가슴을 눌렀다. 나는 손끝으로 내 팔목을 짚어보았다. 맥박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처소 문이 열린 건 사흘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방 안으로 길게 스며들 무렵이었다. 황 장로가 직접 걸어 들어왔다. 평소의 단정한 걸음걸이와는 달리, 어딘가 서두르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뒤에는 낯선 중년 사내가 하나 따라붙었다. 마른 체형에 눈빛이 유난히 날카로운 자였다. 옷깃에는 은사로 새긴 표식이 있었는데, 청림문의 것과는 다른 문양이었다. 걸음마다 옷자락이 소리 없이 흔들렸고, 그 정적인 움직임만으로도 상당한 내공을 쌓은 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호. 이분은 강북 지부에서 오신 조 대협이시다." 황 장로가 말했다. 조 대협이라 불린 사내가 나를 지그시 훑었다.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마치 물건의 가치를 매기는 듯한 시선이었다. "들었던 것보다 흥미로운 아이로군." 그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거의 실려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담담함이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장로님, 요즘 강호가 흉흉합니다. 속세오귀(俗世五鬼)의 움직임이 다시 감지되고 있소." 속세오귀. 나는 그 단어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원작 게임 속에도 존재했던 세력이었다. 다섯 명의 은둔 강자로 구성된 비밀 결사. 무림의 표면 아래에서 세력 균형을 조종하는 자들. 게임 내에서는 후반부 최종 시나리오의 축이었고, 플레이어가 십대문파 전체를 규합해도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최종장의 벽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지금, 그 세력이 이미 활동 중이라는 뜻이었다. 게임의 초반 서사에는 등장하지 않던 이름이, 현실에서는 이렇게 일찍 수면 위로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세계가 원작의 타임라인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다. "속세오귀가 왜 이런 시골 문파를 신경 쓴단 말이오?" 황 장로가 미간을 좁혔다. 목소리에 억눌린 불안이 스며 있었다. 조 대협이 나를 다시 힐끗 보았다. "경맥을 자유롭게 여는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소." 등골이 서늘해졌다. 소문 하나가 이렇게 빠르게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다. 게임 속 설정으로는 속세오귀가 각지에 심어둔 정보망이 무림 전체를 촘촘히 덮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내 몸에 벌어진 일에는 그 그물이 미치지 않으리라 착각한 것이다. 어리석은 방심이었다. 조 대협이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정면으로 나를 겨눴다. "이름이 무엇이었지?" "백정호입니다." 나는 짧게 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썼다. 조 대협이 피식 웃었다. 웃음 끝에 서린 냉기가 방 안 온도를 한층 낮추는 듯했다. "그런 흔한 이름 말고. 앞으로 강호에서 널 부를 이름 말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답을 고르는 사이, 그가 스스로 답했다. "경맥을 읽는 자. 그렇게 불리게 될 것이야." 그 말이 처소 안에 낮게 울렸다. 황 장로의 표정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반가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뒤섞인 얼굴이었다. 나는 그 별호를 속으로 되뇌었다. 경맥을 읽는 자. 어딘가 게임 캐릭터 창의 타이틀 같기도 했다. 스탯창 상단에 떠오를 법한, 화려하지만 실체 없는 문구.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그것이 나를 향한 시선의 무게였다. 한 번 붙은 별호는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조 대협이 자리를 뜨며 마지막으로 말을 남겼다. "속세오귀가 진짜 관심을 갖는다면, 곧 직접 확인하러 올 것이다." 그의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완전히 잦아든 뒤에도, 황 장로는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 아무 말 없이 처소를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창밖의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빛 하나 없는, 먹물을 풀어놓은 듯한 밤이었다. 별호를 얻은 첫날 밤,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잠들지 못했다. 게임 속에서는 최종장에서야 마주쳤을 이름이, 지금 이 순간 내 처소 문턱을 넘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이 정말로 확인하러 온다면, 그때는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나는 어둠 속에서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밤을 그대로 지새웠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