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천장이 낯설었다.
나무 서까래가 삭아 거뭇거뭇했고, 그 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었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초점이 서서히 맞아 들어갔다.
분명히 어제까지 나는 서울 어느 원룸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경맥 AR 시스템의 마지막 빌드를 올리고, 커피를 마시며 모니터를 노려보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빌드 로그가 초록색으로 떨어지던 순간의 안도감.
그리고 두통.
지독한 두통과, 어디선가 들려온 클랙슨 소리.
브레이크음이 찢어질 듯 울렸던 것 같기도 했다.
그다음은 없었다.
몸을 일으켰다.
손끝이 가늘고 마디가 거칠었다.
내 손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검을 오래 쥔 자의 굳은살은 아니었다.
막일과 잡일에 찌든, 거칠고 볼품없는 흔적이었다.
방 안에는 낡은 목검 한 자루와, 벗어놓은 무명 저고리가 걸려 있었다.
목검은 손잡이 부분이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지만, 그 외에는 흠집투성이였다.
누군가에게 맞기만 한 검처럼 보였다.
창밖으로 이질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기와지붕과 흙벽, 그리고 저 멀리 산세를 두른 담장.
공기 중에 낀 흙냄새와 짚풀 태우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협 세계.
내가 만든 게임 속 배경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아니, 닮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이건 그 세계 그 자체였다.
"정호야, 안 일어나면 늦는다!"
문밖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정호.
낯선 이름이 낯설지 않게 뇌리에 스며들었다.
백정호.
청림문 잡역졸.
색공자라는 별명으로 문파 내에서 손가락질받는 하급 무인.
그 정보들이 마치 원래 내 것이었던 양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백정호가 나고 자란 마을의 골목 모양까지도 떠올랐다.
기억의 융합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낙차를 받아들였다.
낙차라기보단 파열이었다.
개발자였던 나와, 문파 최하급 취급을 받는 잡역졸이 한 몸 안에서 겹쳐졌다.
밖에서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급하게 저고리를 걸치고 방문을 열었다.
늙은 문지기 하나가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혀를 찼다.
"꼴이 그게 뭐냐.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나 있는 거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오늘은 청림문의 승급 시험날이었다.
---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은 좁고 가팔랐다.
자갈이 발밑에서 서걱거렸다.
길가에 늘어선 사람들이 나를 볼 때마다 목소리를 낮췄다.
낮췄는데도 그 내용이 다 들렸다.
"저놈 아니냐."
"또 시험 본다고?"
"낯짝도 두껍지."
연무장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삼십여 명의 응시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다들 나를 곁눈질했다.
혐오와 조롱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색공자라는 별명이 헛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원래의 백정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몰라도, 지금 이 몸에 남은 평판은 최악이었다.
누군가는 침을 뱉는 시늉을 했고,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놈이 또 시험을 보러 왔다고?"
누군가 낮게 비웃었다.
옆에 있던 다른 응시자가 맞장구를 쳤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꼴찌였잖아. 뭘 믿고 또 나오는지."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자격도, 이유도 없었다.
이 몸에 쌓인 시간을 나는 살지 않았으니까.
대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단상 위에 노인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백발을 정갈하게 틀어 올린, 청림문의 황 장로였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지만, 그 아래 눈빛만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눈빛이 차분하면서도 예리했다.
한눈에 사람의 그릇을 재는 듯한 시선.
그 시선이 응시자들을 하나씩 훑고 지나갔다.
내 차례가 오기도 전에 벌써 몇몇은 안색이 굳어 있었다.
"오늘 시험은 내력 진단이다."
황 장로가 담담하게 말했다.
"경맥에 진기를 흘려 그 흐름을 보이는 자, 상급으로 인정한다."
주위가 소란해졌다.
경맥 진단.
나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설계했던 시스템의 이름과 똑같았다.
경맥을 12개의 정경과 기경으로 나누고, 진기의 흐름을 선으로 표현해 시각화하는 그 시스템.
서울의 어느 사무실에서 내가 코드를 짜던 그 개념이, 지금 이 세계에서는 실제 무공의 근간이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말도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개발자에서 색공자까지.
차례가 하나씩 줄어들었다.
앞선 응시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손목에서 미약한 열기만 뻗었다가 사그라들었고, 누군가는 아예 아무 반응도 없어 황 장로의 미간이 좁아졌다.
"경맥 두 갈래." 황 장로가 짧게 내뱉을 때마다 그 응시자는 고개를 떨궜다.
평범한 결과였다.
평범해서, 오히려 내 안의 긴장이 더 커졌다.
차례가 다가왔다.
나는 단상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본 황 장로의 눈은 더 깊고 어두웠다.
황 장로가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짚었다.
그 손끝이 차가웠다.
"눈을 감고, 단전에서 기를 끌어올려 보아라."
나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눈앞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파란 선.
붉은 선.
희미한 격자무늬의 배경.
마치 내가 만들었던 UI 그대로였다.
단전을 중심으로 열두 갈래의 경맥이 지도처럼 펼쳐졌다.
그중 몇 갈래는 흐릿했고, 몇 갈래는 선명했다.
막힌 구간에는 붉은 표시가 떠 있었다.
마치 게임 속 버그 리포트 화면 같았다.
심지어 각 경맥의 명칭이 익숙한 서체로 떠올라 있었다.
수태음경.
족양명경.
내가 시스템 설계 문서에 적어 넣었던 그 이름들이 그대로였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건 시스템이다.
내가 아는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걸 다룰 줄 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내가 만든 것이라면,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었다.
"진기를 흘려라."
황 장로가 낮게 명령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격자무늬 지도 위에서 흐릿한 경맥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마치 코드를 실행하듯 명령했다.
흘러라.
순간.
단전에서 뜨거운 것이 폭발적으로 뻗어 나갔다.
그 열기가 팔을 타고, 다리를 타고, 등줄기를 타고 순식간에 퍼졌다.
손목을 짚고 있던 황 장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럴 수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연무장에 있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방금까지 나를 비웃던 자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열두 경맥이 전부 밝혀졌다."
누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뱉었다.
황 장로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손목을 짚은 채로도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정호. 너, 대체 무엇을 배웠느냐."
그 질문 속에는 단순한 놀라움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의심.
경계.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
나는 담담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무엇을 배웠는지 설명하려면,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해야 했으니까.
서울, 개발자, 경맥 AR 시스템.
그 어떤 단어도 이 연무장에서는 통할 리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응시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조롱이 사라진 자리에 경계심이 들어찼다.
누군가는 나에게서 슬쩍 뒤로 물러섰다.
색공자라 부르며 손가락질하던 입들이, 지금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연무장의 정적 속에서, 나는 직감했다.
이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그저 하급 무인 백정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황 장로의 흔들리는 눈빛이 무엇보다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