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00일의 가짜 인생

4화

딸랑. 집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강도현으로 살아달라니.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나는 몇 번이나 그의 얼굴을 살폈지만, 회장의 표정은 진지했고 흔들림 없었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 그 위에 걸쳐진 손목시계, 창문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까지도 이상하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 방 안의 모든 것이 나를 향해 재판을 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다. 도현이는 설악산 기숙학교로 보낸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 아이가 여전히 선일고에 다니고 있는 걸로 보여야 해. 언론이든,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집안이든, 우리 그룹이 흔들린다는 인상을 줘선 안 되니까." 회장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지만, 나는 그 말들이 하나도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만이 귓속을 가득 채웠다. 손끝이 저릿하게 떨려왔고, 나는 그 떨림을 감추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제가…… 왜요. 저는 그 사람이랑 얼굴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성형과 화술 교육은 우리가 책임진다. 반년이면 충분해." 그의 대답은 지나치게 준비된 것처럼 매끄러웠다.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이 계획을 세워두었던 것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미리 다림질된 셔츠처럼 구김살 없이 펴져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골목에서 나를 구해준 게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그때부터 지켜보셨어요?" 회장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길게 늘어지는 동안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리고는 옅게 웃었는데, 그 웃음이 어딘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비슷한 체형, 비슷한 나이, 그리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존재감이 없는 아이. 몇 달째 찾고 있었다." 존재감이 없는 아이. 그 표현이 가슴 한복판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는데, 그것이 부끄러움인지 모욕감인지 알 수 없었다. 학교 복도에서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던 순간들이, 급식실 구석 자리에서 혼자 밥을 먹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도 어릴 때 그랬다."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회장의 눈빛이 순간 아득해지는 게 보였다. 그 커다란 손이 책상 위에서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가 풀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형제가 많은 집이었지. 나는 늘 뒷전이었어. 아버지는 형에게만 눈길을 줬고, 나는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안다. 그 감정이 어떤 건지." 그 말에 나는 뭔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처음으로, 나 같은 감정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회장은 그저 거대하고 낯선 짐승 같은 존재였는데, 지금 이 순간에는 어쩐지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처럼 느껴졌다. "만약 네가 강도현이 된다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다. 명문고에서 인정받고, 아무도 너를 무시하지 못할 거야. 존재감 없이 살던 아이가, 모두가 주목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거지." 그 말이 유혹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그 순간, 매일 창가 자리에서 조용히 가라앉던 나 자신을 떠올렸다. 아무도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않던 나날들, 사진 속에서 잘려나가던 나. 단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나는 늘 맨 끝에 서 있었고, 그마저도 누군가의 어깨에 가려져 반쪼가리로만 남아 있었다. 그 모든 걸 벗어날 수 있다는 유혹은 너무나 강렬했다. "하지만…… 저는 원래의 저로는 살 수 없게 되는 거잖아요." "어차피 지금의 너로 살아서 얻는 게 뭐가 있나." 그 질문이 날카롭게 파고들었고, 나는 순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이었다. 지금의 나로 살아서 얻는 게 없었다. 나는 그저 투명한 존재였을 뿐이었다. 엄마가 밤늦게 퇴근해 지친 얼굴로 돌아오는 걸 보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한 존재였다.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하지만 오래는 안 돼. 도현이 전학 처리는 곧 마무리될 거고, 입학식은 다가오고 있어." 나는 그 방을 나서며,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다. 마치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온몸에 힘이 빠져서, 복도를 걷는 동안 몇 번이나 벽을 짚어야 했다. 세단이 다시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나는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회장의 말을 되새겼다. 존재감 없이 살던 아이가, 모두가 주목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거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간판들, 신호등,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그 모든 풍경 속에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강도현이라는 그 얼굴 모르는 아이는, 지금 이 순간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자신의 삶이 이렇게 통째로 다른 사람에게 넘겨진다는 걸, 그 애는 알고 있을까. 집에 돌아온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밤새 뒤척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가도 숨이 막혀 다시 걷어차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엄마에게도 이 일을 말할 수 없었다. 안방에서 새어 나오는 낮은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몇 번이나 문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이건 나 혼자 결정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음 날, 나는 다시 그 세단을 타고 태산그룹 본사로 향했다. 창문에 이마를 대고 앉아 있는 동안, 어젯밤 한숨도 못 잔 얼굴이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쳤다. 눈 밑이 퀭했고, 입술은 하얗게 말라 있었다. 회장은 이번에도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천천히 돌아섰다. 그 뒷모습이 마치 처음부터 내가 이 대답을 들고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여유로워 보였다. "결정했나."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심장이 사시나무처럼 떨렸지만, 나는 애써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나오기 전, 목구멍 안쪽에서 뭔가가 턱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겠습니다."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이상하게도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무겁게 짓누르던 무언가가 벗겨지는 느낌. 그러나 그 가벼움은 안도가 아니라, 오히려 발밑이 사라지는 듯한 아찔함에 더 가까웠다. 회장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그 미소는 이상하게도, 안심이 아니라 오히려 서늘한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입꼬리는 분명 웃고 있는데 눈은 조금도 웃지 않는, 그런 이질적인 표정이었다. 나는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걸 느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좋아. 그럼 오늘부터 넌 강도현이다." 그 말이 방 안에 울리는 순간, 나는 내가 정말로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회장이 손을 뻗어 책상 위 인터폰을 눌렀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누군가를 호출했다.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소리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걸 느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실감이, 그제야 온몸으로 밀려들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