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00일의 가짜 인생

3화

딸랑, 하는 알림음이 부엌 라디오에서 울렸다. 아침을 준비하며 텔레비전을 틀어놓은 채였는데, 평소라면 흘려들었을 뉴스 소리가 그날은 유독 귀에 박혀 들어왔다. 나는 밥그릇을 앞에 두고 국을 뜨던 숟가락을 든 채로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앵커의 목소리가 또박또박, 마치 나를 향해 직접 말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태산그룹 강태산 회장의 손자로 알려진 강도현 군이 어제 오후 자택 인근에서 흉기에 찔릴 뻔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밥을 씹던 입이 그대로 멈췄다. 화면에는 흐릿하게 모자이크된 얼굴 사진과 함께, 노란 통제선을 두른 골목과 그 앞을 서성이는 경찰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강도현. 태산그룹 회장의 손자.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서랍 속에 넣어둔 명함을 다시 떠올렸다. 강태산이라는 이름이 검은 잉크로 새겨진 그 명함.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 그 이름이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걸까. 앵커는 사건의 경위를 이어서 설명했다. 강도현이라는 남학생이 여러 여성과 동시에 만남을 유지해왔고, 그중 한 명이 배신감을 느껴 흉기를 들고 찾아왔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큰 부상은 피했지만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화면 아래로는 자막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렘왕 논란, SNS 발칵' 앵커는 씁쓸한 어조로 강도현이 최근 자신을 '하렘왕'이라 칭하며 SNS에 여러 여성과 나란히 찍은 사진을 올려 논란이 일었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화면에는 흐릿하게 지워진 사진 속에서도 화려한 옷차림과 웃고 있는 여러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밥그릇을 앞에 두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숟가락을 쥔 손이 그대로 허공에 떠 있었고, 국물이 식어가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 회장의 손자라는 아이가 그런 사고를 쳤다니. 그리고 그 회장이 왜 나를 골목에서 구해줬는지, 왜 나에게 명함을 주며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라 말했는지, 그 둘 사이에 어떤 실 하나가 이어져 있는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 학교에 가서도 그 뉴스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1교시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 목소리는 귓가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고, 노트 위에는 아무 글자도 채워지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되자 몇몇 애들이 휴대폰을 돌려보며 관련 기사를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완전 미친놈이네. 하렘왕이 뭐야, 이 시대에." "근데 진짜 재벌집 손자래. 태산그룹이면 완전 큰 회사잖아." "찔릴 만하지 뭐. 여러 명이랑 양다리를 몇 개나 걸친 거야." 그런 대화들이 오갔지만, 나는 그저 조용히 그 소음 속에 섞여 있을 뿐이었다. 늘 그렇듯 아무도 내게 의견을 묻지 않았고, 나 역시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다만 손끝이 자꾸만 저릿했다. 마치 그 아이의 이름이 내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끼어들 것 같은 예감. 근거 없는 불안이었지만, 하루 종일 가슴 한켠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혀 있는 기분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나는 창밖을 힐끗거리며 괜히 골목 쪽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초조했다. ***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 어귀에서 그 검은 세단이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와 같은 자리, 같은 각도로 서 있는 차였다. 이번엔 창문이 완전히 내려가 있었고, 운전석에 앉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조용히 말을 건넸다. "라온 학생, 회장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나는 순간 뒤돌아 도망쳐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리가 이미 그 세단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발이 저절로 앞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스스로도 낯설 만큼 작고 위축된 소리였다. "타시면 압니다." 남자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마치 이미 정해진 일을 통보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결국 뒷좌석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마치 세상과 단절되는 듯한 둔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고, 나는 그 순간 내 삶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차 안은 조용했다. 은은한 가죽 냄새와 차가운 에어컨 바람만이 좁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창밖으로 익숙한 동네가 점점 낯선 고층 빌딩들로 바뀌어가는 걸 바라보며, 나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꼭 쥐었다.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무릎을 문질렀지만,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 차가 도착한 곳은 태산그룹 본사 건물이었다. 거대한 유리로 된 건물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로비에는 나 같은 사람은 평생 밟아볼 일 없을 것 같은 대리석 바닥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안내를 맡은 직원이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또각또각 울릴 때마다,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져 몸이 움츠러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계속 팔딱거렸다. 숫자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넓은 집무실에서 강태산 회장이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뒷모습만 봐도 이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는 내가 들어서자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 눈빛은 골목에서 봤던 것과 똑같이 깊고 무거웠다. 시린 겨울바람 같으면서도 묵직한 그 존재감이 방 안 전체를 짓누르는 듯했다. "왔군." 그가 나를 향해 소파를 가리켰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앉았고, 그는 맞은편에 앉으며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뉴스는 봤겠지." "……네." "내 손자 놈이야. 사고를 쳤어." 그의 목소리에는 실망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지만, 동시에 어딘가 지친 기색도 묻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아이는 설악산 인근으로 보낼 거다. 남자만 있는 기숙학교로. 당분간 조용히 지내야 하니까." 나는 그가 왜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는데,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시선이 마치 먹잇감을 노려보는 짐승의 눈빛 같아서, 나는 순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라온이라고 했지." "……네." "너에게 제안할 게 있다." 그 순간, 창밖으로 해가 완전히 저물며 방 안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고, 나는 이유 없이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방금까지 들리던 시계 초침 소리조차 유독 크게 들려왔다. ……왜 이러지. 목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나는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 손자 대신, 선일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강도현으로 살아줄 수 있겠나."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