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00일의 가짜 인생

1화

딸랑, 하고 교문 앞 매점의 낡은 종이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뒷문으로 슬쩍 빠져나왔는데, 누구도 나를 붙잡지 않았고 누구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라온. 담임선생님조차 출석부를 부를 때 내 이름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다음 이름으로 넘어가는 버릇이 있었으며, 그 잠깐의 멈춤이 나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작은 확인 같은 것이었다. 아, 저기 있었구나. 그 정도의 확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교실 안에서도 나는 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옆자리 애가 필기구를 빌리려 손을 뻗을 때조차 내 쪽이 아니라 뒷자리로 몸을 돌려 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지우개를 만지작거리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창밖을 바라봤는데, 사실은 심장 어딘가가 조용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물속에 던져진 돌처럼 소리 없이 가라앉아, 아무도 그 파문을 눈치채지 못하는 상태.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조를 나누라고 할 때도 나는 항상 남는 사람이었다. 네 명씩, 다섯 명씩 짝을 지어 앉으라는 말이 떨어지면 교실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고, 그 소란 속에서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누군가가 나를 데려가 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선생님이 "라온이는 저기 남는 자리로" 하고 지정해줘야만 조에 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옮겼다.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급식판을 들고도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가장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는 걸 택했다. 밥을 먹는 동안 옆 테이블에서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웃음의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고, 알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밥알을 씹으며 숫자를 세듯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익숙했다. 국물이 식어가는 속도, 식판 위 반찬의 개수, 창밖으로 지나가는 구름의 모양. 그런 것들을 세면서 시간을 죽이는 게 내 나름의 생존법이었다. 그날 하굣길은 평소보다 조금 늦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반납하고 나오는 길에 하늘이 벌써 붉게 물들어 있었고, 나는 이어폰도 꽂지 않은 채 골목으로 들어섰다. 가방 안에는 반납일이 지난 책 대신 새로 빌린 책 두 권이 들어 있었는데, 그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서 나는 자꾸만 가방끈을 고쳐 메야 했다. 골목 어귀에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고, 그 순간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야, 거기." 낮고 걸걸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을 때, 나는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팔딱거리는 걸 느꼈다. 돌아보니 셋.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애들이 담벼락에 기대어 있다가 어느새 내 앞을 막아섰고, 그중 하나가 손가락을 딱딱 튕기며 다가왔다. 다른 하나는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씨익 웃었는데, 그 웃음이 어쩐지 사냥을 시작하는 짐승의 표정처럼 보였다. "돈 있냐." "없, 없는데……" 말끝이 떨려 나왔고, 나는 그게 스스로도 한심하게 느껴져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몸은 이미 얼어붙어 있었다. 옴짝달싹 못하는 채로, 나는 그저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뒷걸음질을 쳤는데 등이 곧 벽에 닿았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벽돌의 차가운 감촉이 등을 통해 스며들어왔고, 나는 그 순간 이 좁은 골목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감옥처럼 느껴졌다. "주머니 뒤져봐." 누군가 내 어깨를 거칠게 밀었고, 나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아프다는 감각보다 먼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죽을 것 같아. 그런 생각이 스쳤을 때, 한 녀석이 내 가방을 낚아채려 손을 뻗었다. 다른 하나는 낄낄거리며 내 어깨를 발끝으로 툭툭 찼는데, 그 발끝의 감각이 옷을 뚫고 살갗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야, 이거 뭐 들었나 보자." 가방끈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걸 느끼며 나는 반사적으로 그걸 붙잡았지만, 힘으로는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가방끈을 움켜쥔 채, 나는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골목 어귀에서 낮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였다. 그 소리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박자로 골목의 정적을 갈랐다. 세 남자애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고, 나는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골목 입구에 서 있는 건 노신사였다. 흰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긴 채, 검은 코트를 걸치고 지팡이 하나 들지 않았는데도 그 존재감만으로 골목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는 게 느껴졌다. 눈빛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깊고 서늘한, 아무런 흔들림도 없는 눈빛이었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코트 자락 사이로 드러난 손목이었는데, 나이가 짐작되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이는 손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체격. 크지 않았음에도 어딘가 산처럼 묵직해서, 골목 전체를 짓누르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낮고도 무겁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세 남자애 중 가장 앞에 있던 녀석이 코웃음을 치며 뭐라 대꾸하려던 순간, 노신사가 한 걸음 다가섰을 뿐인데 그 녀석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는 게 보였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뭔가 거대한 그림자가 그 노인의 등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호랑이. 그 순간 떠오른 단어는 그것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세 남자애는 뒷걸음질치듯 물러나더니 이내 등을 돌려 골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골목 끝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그 낯선 노신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개가 꺾일 정도로 올려다봐야 하는 높이였는데, 실제로는 키가 그렇게 크지 않았음에도 그 순간만큼은 하늘만큼 높아 보였다. "괜찮나."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하니 바라봤는데, 손등에 깊게 새겨진 주름과 그 사이로 드러난 단단한 힘줄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나는 쉽게 그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무릎에서 시작된 통증이 뒤늦게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고, 나는 그 통증에 집중하며 애써 그의 손을 외면했다. "……괜찮아요." 겨우 그 말만 뱉으며 스스로 일어섰다. 무릎이 까져서 따끔거렸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이 노인이 나를 왜 도와줬는지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배워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문득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다정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계산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름이 뭔가." "……라온이요." "라온." 그가 그 이름을 곱씹듯 되뇌었다. 마치 그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해두려는 사람처럼. 그리고는 아무 설명도 없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멍하니 서 있었는데, 명함에는 굵은 글씨로 '태산그룹 회장 강태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종이의 질감마저 두껍고 단단해서, 손끝으로 만지는 것만으로도 그 무게가 느껴졌다.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골목을 빠져나갔다. 구두 소리가 다시 또각또각 울리며 점점 멀어졌고, 나는 명함을 손에 쥔 채로, 방금 벌어진 일이 현실인지 아닌지 가늠도 못한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겨울바람 같은 냄새가 아직도 골목에 남아 있었다. 시리면서도 묵직한, 그런 향. 그 향은 담배 냄새도, 매캐한 골목의 공기도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냄새였다. 무릎이 까진 자리가 따끔거렸다. 나는 그 통증을 느끼며 천천히 명함을 가방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는데, 손이 떨려서 몇 번이나 지퍼를 놓쳤다. 태산그룹. 그 이름을 나는 몰랐지만, 어쩐지 그 세 글자가 무겁게 가슴에 얹히는 것 같았다.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다. 그 말이 이상하게도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저 붉게 물든 하늘과, 텅 빈 골목뿐이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날 밤, 나는 명함을 손에 쥐고 잠들 때까지 그 이름을 곱씹었다. 강태산. 그리고 그 이름이 내 인생을 어떻게 뒤흔들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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