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00일의 가짜 인생

2화

그날 밤, 나는 명함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몇 번이나 다시 들여다봤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강태산이라는 이름과 태산그룹이라는 글씨가 은색으로 반짝였다. 종이라기보다는 얇은 금속판 같은 질감이었는데, 손끝으로 문지르면 매끈하면서도 서늘한 느낌이 전해졌다. 나는 그것이 혹시 위조된 것은 아닐까 싶어 불빛에 비춰보기도 하고, 손톱으로 글자의 음각을 긁어보기도 했다. 진짜였다. 너무 진짜여서 오히려 더 낯설었다. 책상 스탠드를 끌어당겨 노트북을 켰다. 검색창에 태산그룹을 치자 수십 개의 뉴스 기사가 쏟아졌다. 계열사가 몇 개인지 셀 수 없을 정도였고, 강태산이라는 이름은 대부분의 기사 맨 앞줄에 박혀 있었다. 사진 속 그는 짙은 색 슈트를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만으로도 화면 너머의 내가 움찔할 정도였다. 실질적 지배자. 기사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런 사람이 왜, 어쩌다, 나 같은 존재를 도와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다. 노트북을 덮고 침대에 누워서도 나는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봤다. 형광등 불빛의 잔상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다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 다음 날 학교에서도 나는 여전히 투명인간이었다. 담임은 출석을 부를 때 내 이름 앞에서 또 잠깐 멈췄다가,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이름이 없었던 것처럼 다음 이름으로 넘어갔다. 옆자리 애는 오늘도 필기구를 뒷자리에서 빌렸다. 나는 분명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도,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유리로 둘러싸인 것처럼 아무도 나를 향해 손을 뻗지 않았다. 급식실에서도 나는 혼자 줄을 섰고, 혼자 자리를 찾았고, 혼자 밥을 먹었다. 숟가락이 식판에 닿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그 모든 걸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하루를 흘려보냈는데, 문득 어릴 적 기억이 스치듯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가족 사진 속에서도 항상 구석에 서 있었다. 부모님은 형과 나를 나란히 세우고 사진을 찍었지만, 정작 인화된 사진을 보면 형이 정중앙에 서 있고 나는 프레임 끝에 반쪽만 걸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카메라를 든 아빠는 형의 얼굴이 잘 나오게 하려고 계속 자리를 조정했고, 그때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옆으로 밀려났다. 엄마는 그때마다 웃으며 다시 찍자고 했지만, 다시 찍은 사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조금씩 잘려나가는 사람이었다. 형이 상을 받아올 때마다 온 집안이 들썩였다. 케이크를 사 오고, 친척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거실 벽에는 형의 상장이 액자에 담겨 걸렸다. 하지만 내가 뭔가를 해낸 날은 그저 저녁 반찬이 하나 더 늘어나는 정도로 지나갔다. 나쁜 부모는 아니었다. 그저 나라는 존재가 늘 형이라는 태양 옆의 작은 위성처럼,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런 기억들이 스쳐가는 와중에도, 나는 주머니 속 명함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닿는 매끈한 감촉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다.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 며칠 후, 등굣길에 낯선 검은 세단이 학교 앞 도로에 정차해 있는 걸 보았다. 크고 반질반질한 차체가 아침 햇살을 받아 유난히 도드라졌다. 나는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그 차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며 안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였는데, 그는 나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다시 창문을 올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눈빛에는 낯선 사람을 처음 보는 어색함이 아니라, 마치 원래 알고 있던 사람을 확인하는 듯한 익숙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별일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학교로 들어섰다. 교문을 지나면서도 등 뒤가 서늘했다.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렀다. 그날 오후에도, 학원을 오가는 길에서 같은 세단을 두 번이나 마주쳤다. 처음엔 골목 하나를 지나칠 때, 두 번째는 학원 건물 바로 앞 사거리에서였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잦았다. 나는 걸음을 서두르며 뒤를 돌아봤는데, 그 차는 여전히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속도를 높이지도,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저 정확히 그 거리를 유지하며 나를 지켜보듯 뒤따라왔다.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했다. 나는 골목을 하나 더 꺾어 들어가 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편 도로에서 같은 차가 다시 나타났다. *** 집에 도착해서도 그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손이 떨려서 현관 비밀번호를 두 번이나 잘못 눌렀다. 나는 방 안에서 커튼을 살짝 걷고 창밖을 내려다봤는데, 골목 어귀 가로등 아래 낯익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오전에 세단 안에서 목례를 했던 그 남자였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지만, 시선은 분명 우리 집 창문을 향해 있었다. 통화를 하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면서도, 눈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나는 커튼을 급히 다시 닫고, 방문을 잠갔다. 문고리를 꽉 붙잡은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나를. 도대체 왜, 나 같은 사람을. 책상 앞에 앉아 숨을 몰아쉬면서도, 나는 서랍 속에 넣어둔 명함을 다시 꺼내 뒤집어 봤다. 뒷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새하얀 여백뿐이었다. *** 그날 저녁, 엄마가 퇴근하고 돌아와 저녁을 차렸다. 된장국 냄새가 좁은 집안을 채웠고, 도마 위에서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나는 밥상 앞에서도 계속 창밖을 신경 쓰며 젓가락질을 하다가, 결국 명함을 슬쩍 꺼내 엄마에게 보여줬다. "엄마, 이거 아는 사람이야?" 엄마는 명함을 받아 들고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젓가락을 내려놓는 손끝이 순간 멈췄다. "이거…… 태산그룹? 이걸 왜 네가 갖고 있어?" "며칠 전에 어떤 할아버지가 도와주셨는데, 그분이 주신 거야." 나는 자세한 상황까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스스로도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표정이 순간 복잡해졌다. 걱정과 놀람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명함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몇 번이나 글자를 다시 확인하더니,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 그런 큰 회사 사람들은…… 그냥 우리 같은 사람들이랑은 다른 세상 사람들이야." "왜? 그냥 도와주신 건데." "세상에 그냥은 없어." 엄마의 말이 맞았다. 나는 명함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다. 그 말이 정말로 실현되고 있는 걸까. 세단도, 목례를 한 남자도, 가로등 아래 서 있던 그 시선도 전부. 저녁을 먹는 내내 나는 몇 번이나 창문 쪽을 흘겨봤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별일 없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만 저었다. *** 그날 밤, 나는 잠들기 전 창밖을 다시 살폈다. 가로등 아래 그 남자는 사라져 있었다. 안도감이 잠깐 스쳤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신 골목 끝에 낯선 오토바이 한 대가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헬멧을 쓴 사람 하나가 그 옆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선의 방향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상하게 심장이 조여오는 걸 느끼며 커튼을 완전히 닫았다. 방 안의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심장은 여전히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이고 있었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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