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남작가 삼남의 환골탈태

5화

왕궁에서 보내온 초청장은 다음 주에 열릴 왕실 무예 시범 관람회에 관한 것이었는데, 도현은 봉투를 열어 그 안의 문구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면서도 그것이 어째서 자신에게 도착했는지 곧바로 짐작할 수 없었으나, 관례상 왕실 행사에 초청받을 만한 신분도 공적도 없는 자신에게 이런 초청장이 날아든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기에, 혹시 잘못 배달된 것은 아닌지 봉투 겉면의 이름을 다시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분명하게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도현은 초청장 하단에 빼곡히 적힌 참석자 명단을 천천히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그 명단 속에서 서윤과 태원의 이름이 나란히, 마치 애초부터 한 쌍으로 정해진 것처럼 붙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태원…… 그 이름을 여기서 왜.' 청연국 공작가의 적자로 이름난 태원은 도현도 몇 번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는데, 훤칠한 키와 흠 없는 품행으로 항상 사교계의 중심에 서 있던 그는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모으는 재주를 가진 자였고, 그런 그가 서윤과 나란히 이름이 적힌 것을 보며 도현은 막연한 불안이 가슴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설마…… 아니야, 그냥 초대객 명단일 뿐이야. 순서대로 적혔을 수도 있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보았지만, 그 다독임이 오히려 더 큰 불안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도현은 곧 깨닫고 말았는데, 결국 그는 그 종이를 서랍 깊은 곳에 밀어 넣어버렸으나, 관람회 당일이 다가올수록 그 이름들이 자꾸만 눈앞에 떠올라 잠을 설치는 밤이 이어졌다. 관람회 당일, 왕궁 연무장에 모인 귀족들 사이에서 도현은 지은과 함께 뒤쪽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넓은 연무장 위로는 이른 오후의 햇살이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화려한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낮은 웃음소리들이 뒤섞여 묘하게 들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범이 시작되기 전 짧은 담화의 시간이 마련되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도현은 애써 시선을 다른 곳에 두려 했으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우연히 서윤의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서윤은 여느 때처럼 단정하고 빛나는 모습이었는데, 은은한 색의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그녀의 옆모습은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 정갈했으나, 그녀의 옆에 자연스럽게 서 있는 태원의 존재가 도현의 시야를 순식간에 뒤흔들어버렸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듯 서로에게 익숙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태원이 무언가 말을 건네면 서윤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도현의 눈에는 낱낱이 새겨지듯 박혀왔는데, 그 웃음이 예전 자신에게 보여주던 것과 얼마나 닮았는지, 혹은 얼마나 다른지를 가늠해보려는 자신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저 두 사람, 사실 벌써 연인 사이라던데." 뒤쪽에서 들려온 낮은 수군거림에 도현은 순간 숨을 멈추고 말았고,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맞장구를 치듯 이어졌다. "청연국 공작가와 그쪽 집안이면 어울리기야 하지. 아까워라, 저런 미인이 왜 그동안 숨어 있었던 건지." "숨어 있었던 게 아니라, 누구 때문에 못 나왔던 거겠지." 그 말끝에 짧은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는데, 그것이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도현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주변의 시선들이 서윤과 태원 쪽으로 하나둘 몰려들며 소문이 빠르게 번져나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연인 사이라니…… 언제부터. 나는 어째서 그것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거야.' 그 물음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태원이 서윤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 이끌며 사람들 앞으로 나서더니, 마치 그 소문을 스스로 확인시켜주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소문이 났으니 굳이 숨길 이유는 없겠군요. 저와 서윤 양은 오래전부터 함께해온 사이입니다." 그 선언에 연무장 전체가 잠시 술렁였고, 몇몇은 짧게 탄성을 내지르며 축하의 말을 건넸는데, 도현은 그 순간 자신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숨을 삼켰다. 서윤은 그런 도현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원의 곁에서 옅은 미소를 유지한 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했기에 도현은 오히려 그 평온함이 더 잔인하게 느껴졌고, 혹시 자신을 향한 어떤 신호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품고 그녀의 눈을 필사적으로 쫓았으나, 서윤의 시선은 단 한 번도 그가 앉은 자리 쪽으로 흘러들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그럼 나와 함께였던 그 시간들은, 도대체 무엇이었던 거야.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혼자 무언가를 쌓아온 거였나.' 그 물음이 가슴속에서 날카롭게 부서지는 순간,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으나, 지은이 그의 손을 붙잡아 다시 앉히며 낮게 속삭였다. "지금은 아니야. 참아." 지은의 단호한 목소리에 도현은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고,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두 손을 무릎 위에서 힘없이 움켜쥐었는데, 지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온기만이 그를 자리에 붙들어두는 유일한 끈처럼 느껴졌다. '참아야 해…… 여기서 무너지면, 저들 앞에서 우스운 꼴만 남기게 될 뿐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으려 애쓰는 사이, 그의 품 속에서 무언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바스락. 무심코 손을 넣어 확인한 것은, 서재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고 생각했으나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채 챙겨 나온 서윤의 옛 편지 한 장이었는데, 오늘 아침 급히 옷을 갈아입으며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밀어 넣었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도현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펼쳐보다가, 예전엔 무심히 넘겼던 마지막 문장 하나에 시선이 멈추고 말았다. '네가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언젠가 네가 정말 원하는 걸 찾았을 때, 나는 그 옆에 있을 자격이 없을지도 몰라.' 오래전 서윤이 무심히 적어 보냈던 그 문장을, 도현은 그동안 그저 다정한 인사말로, 혹은 서윤 특유의 겸손한 성격에서 나온 상냥한 배려의 말로 흘려 읽어왔는데, 편지를 받았던 그날에는 오히려 그 문장이 다정하게 느껴져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웃음을 지었던 기억까지 있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것이 실은 자신을 향한 진짜 경고이자, 동시에 그녀 자신조차 예감하고 있던 이별의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으며 손끝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때부터…… 서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나는 그걸 놓친 거고. 아니, 놓친 게 아니라 외면했던 건지도 몰라.' 그 생각이 들자 도현은 지난 몇 달간 서윤과 나누었던 대화들, 그녀가 문득문득 흘렸던 조심스러운 말들, 자신이 무심히 넘겼던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가 새삼 다르게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이별을 준비하던 이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가슴 한복판이 뻐근하게 저려왔다. 연무장 안에서는 여전히 태원과 서윤을 향한 축하와 수군거림이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나, 도현의 귓가에는 오직 그 편지 속 문장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들이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네가 정말 원하는 걸 찾았을 때…… 서윤, 그럼 지금 이게 네가 원했던 거였어? 태원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고, 도현은 그저 그 자리에 앉아 태원의 곁에서 웃고 있는 서윤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순간 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결심 하나가 가슴 깊은 곳에서 서서히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몸을 곧게 세웠다. 지은이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무어라 입을 열려 했으나, 도현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 그냥……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지은은 미처 묻지 못했고, 도현은 이미 자리에서 벗어나 연무장 앞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의 눈은 오직 서윤과 태원, 그 두 사람이 서 있는 곳만을 향해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