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연회에서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도현은 여전히 그날 밤 서윤의 목소리를 떨쳐내지 못한 채 저택 뒷마당 나무 그늘 아래 멍하니 앉아 있었고, 그런 그의 발치에는 어린 시절부터 서윤과 함께 뛰어놀던 그 작은 연못이 그대로 남아 있어 자연스레 기억을 끌어올렸다.
연못 위로 저녁 바람이 스치자 수면이 잔잔하게 일렁였는데, 그 흔들림 속에서 도현은 어릴 적 서윤과 함께 이 자리에 나란히 앉아 물고기를 세던 순간을 떠올렸고, 그때는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던 시간들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왜 이렇게 낯설고 아프게 느껴지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도현과 서윤은 같은 영지에서 나고 자란 사이였는데, 서윤의 가문이 학문과 검술 모두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딸을 자랑스러워했던 반면 남작가의 삼남이었던 도현은 애초에 큰 기대를 받지 못한 채 자란 아이였고, 그 때문인지 그는 늘 자기 의견을 앞세우기보다 상대의 뜻에 맞춰 움직이는 쪽이 편하다고 여기며 성장해왔다.
형들은 이미 가문의 후계와 무공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고, 부모는 삼남에게까지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으므로, 도현은 자연스레 홀로 시간을 보내는 법을 익혔는데,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곁을 내어준 사람이 바로 옆 저택에 사는 서윤이었고, 그래서인지 그는 서윤이 무언가를 청할 때마다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역할인 것처럼 여겨 온 힘을 다해 응하곤 했다.
"도현아, 오늘은 나랑 검술장 가자."
어린 서윤이 그렇게 말하면 도현은 그날 무엇을 하려고 했든 곧바로 접어두고 그녀를 따라나섰고, 반대로 자신이 무언가를 함께 하자고 청했을 때 서윤이 "오늘은 안 돼, 다음에"라고 답하면 그는 별다른 서운함도 내비치지 않은 채 순순히 물러섰는데, 그런 관계가 십수 년 동안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도현은 그날 밤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낯설게 자각했다.
한번은 도현이 서윤에게 강가에서 함께 낚시를 하자고 청했던 적이 있었는데, 서윤은 시험 준비가 바쁘다며 손을 내저었고, 도현은 알겠다고 웃으며 돌아섰지만 정작 강가에는 홀로 앉아 낚싯대를 던져놓고 반나절을 보냈던 기억이 있었으며,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이런 식으로 혼자 남겨진 적이 몇 번이었는지 헤아려보려 했으나 도무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는 사실에 조용히 실소를 흘렸던 것도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나는 늘 그런 식이었지.'
연못 표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는 속으로 되뇌었고, 그 물음은 곧 더 오래된 기억 하나를 소환했다.
열다섯 살 무렵, 서윤이 왕립 학술원 입학시험을 앞두고 극심한 압박감에 시달리던 날이 있었는데, 그녀는 도현을 불러 앉혀놓고는 아무런 사과도 없이 자신의 불안을 있는 그대로 쏟아냈고, 도현은 그 밤을 꼬박 새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기말 검술 시험이 다음 날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만약 떨어지면 어떡하지…… 아버지가 얼마나 실망하실지, 도현아 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서윤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도현은 그 말에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었으므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는데, 그러는 사이 창밖으로 동이 트고 있었다는 사실을 두 사람 다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마워, 너밖에 없어."
다음 날 아침 서윤이 그렇게 웃으며 건넨 말이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보상처럼 느껴졌으나,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그 말 뒤에 감춰진 것은 결국 도현이 언제든 부르면 나타나고, 언제든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존재라는 전제였을 뿐, 그 이상의 무언가를 그녀가 그에게 돌려준 적은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날 도현은 결국 시험장에서 반쪽짜리 실력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고, 검을 놓치고서야 자신이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시험이 끝난 뒤 그 누구에게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서윤에게조차 그 사실을 굳이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다.
'왜 나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왜 서윤이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았을까.'
그 생각에 이르자 도현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지만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고, 다만 가슴 한복판이 뻐근하게 조여오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는데, 그 손끝에 닿은 것은 뜻밖에도 축축한 물기였고, 자신이 언제부터 울고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는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는 별 몇 개가 흐릿하게 떠 있었고, 도현은 그 별빛조차 서윤의 눈동자를 닮았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는데, 그때는 그런 감정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저 서윤이 웃어주면 하루가 다 괜찮아지는 것 같았던, 그런 단순하고도 절대적인 마음이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바스락.
등 뒤 풀숲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도현은 뒤돌아볼 기운도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고, 잠시 후 익숙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누군가 그의 어깨 위에 담요를 걸쳐주었다.
"여기서 얼마나 앉아 있었던 거야."
누나 지은의 목소리였는데, 도현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고, 지은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그 안에는 걱정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지은은 도현보다 다섯 살 위였고, 어릴 때부터 유독 동생을 챙기던 사람이었는데, 남작가 안에서도 형들의 그늘에 가려진 도현을 유일하게 제대로 바라봐주던 사람이 바로 지은이었으므로, 도현은 지은 앞에서만큼은 굳이 애써 웃음을 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윤이 얘기, 벌써 들었어."
지은의 말에 도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시선을 떨어뜨렸고, 그런 그의 반응에 지은은 옆에 조용히 앉아 한동안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함께 어둠을 바라보아주었다.
"너도 참……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 삭이려고 그래."
지은이 낮게 중얼거렸지만 도현은 그 말에도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는데, 사실 그 자신도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의 위로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였으므로 그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켰다.
그 침묵 속에서 도현은 또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는데, 서윤이 학술원 최우수 졸업생으로 뽑혔던 날, 그녀는 축하 인사를 건네러 온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도현을 향해 딱 한 번 손을 흔들어주었을 뿐, 그날의 주인공 자리는 온전히 그녀 자신의 것이었고 그는 그저 그 빛나는 순간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관객에 불과했었다.
그날 도현은 축하 화환을 사기 위해 반나절을 뛰어다녔고, 서윤이 좋아하는 흰 백합을 구하기 위해 이웃 영지까지 다녀왔지만, 정작 서윤은 그 꽃다발을 받아 들고서도 다른 축하객들과의 대화에 더 집중했었으며, 도현은 그런 그녀의 옆에서 그저 웃으며 서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오늘 밤이 되어서야 다시금 곱씹게 되었다.
'그때도 나는…… 서윤의 하루를 빛나게 만드는 배경 중 하나였을 뿐이었나.'
그 물음에 도현은 좀처럼 답을 찾지 못했고, 지은은 그런 동생의 옆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현아, 너도 이제는…… 네가 뭘 원하는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어?"
지은의 목소리에는 나무람보다는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있었고, 도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다시 한번 뻐근하게 조여오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자신이 마주한 공허의 정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으며 밤은 그렇게 깊어져 갔다.
연못 위로 부는 바람이 조금씩 차가워지고 있었지만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자신이 지금까지 서윤을 향해 품어온 그 마음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우정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도 오래 아팠고 그 이상의 무언가라 부르기에는 너무도 조심스러웠던 그 감정의 이름을 이제는 정말로 마주해야 할 때가 온 것인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 채 그저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