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왕궁 연회장의 샹들리에 불빛이 대리석 바닥 위로 부서져 내리던 그 밤, 도현은 정원으로 이어지는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서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늘 그렇듯 그녀는 무리 속에서도 유독 환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어 그 사실이 새삼스레 그의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청연국 왕실이 매해 봄마다 여는 이 연회는 신진 귀족가의 자제들이 얼굴을 알리는 자리였고, 왕실 대신들의 눈에 들어 훗날 조정의 요직을 얻거나 혹은 명망 있는 가문과 혼사를 맺을 기회를 잡는, 그야말로 일 년 중 가장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지는 무대였는데, 남작가의 삼남으로 태어나 딱히 눈에 띌 것도 없던 도현으로서는 그저 서윤의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 이 자리에 설 이유를 얻는 셈이었으나, 그날 밤 그녀가 건넨 한마디는 그런 그의 위치마저 통째로 뒤흔들어 놓았다.
"도현, 우리 이제 그만하자."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는데, 오히려 그 담담함이 더 서늘하게 느껴져 도현은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서윤의 옆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늦봄의 달빛을 받아 옅은 금빛으로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그 아래 드러난 눈매는 언제나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그만하자니…… 그게 무슨 말이야.'
속으로 되물으면서도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난간을 움켜쥐었는데, 손바닥에 닿는 대리석의 차가운 감촉조차 지금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고, 오히려 그 냉기가 그대로 심장까지 파고드는 것 같아 그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물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순간이 처음은 아니었다.
작년 이 무렵,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이 테라스에 나왔을 때, 서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웃으며 그의 소매를 붙잡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도현, 저기 봐. 별이 저렇게 낮게 떠 있는 건 오늘이 처음이야."
그때의 서윤은 손끝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였고, 도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삼남이라는 사실 따위는 잊을 수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그 기억이 하필 떠오른 것이 그를 더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서윤은 그런 그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놀란 표정 짓지 마. 너도 알고 있었잖아,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계속 갈 수는 없다는 거."
담담하게 이어지는 말에 도현은 목 안쪽이 뜨겁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채로 그저 숨을 삼키고 말았다.
'왜 지금……, 왜 하필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연회장 안쪽에서는 여전히 현악기의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테라스까지 넘어왔지만, 도현의 귀에는 그 어떤 소리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으며 오직 서윤의 다음 말만이 세상의 전부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문득 지난 몇 달간 서윤이 부쩍 말수가 줄었던 것을, 그리고 그가 그녀의 눈길을 마주칠 때마다 어딘가 초점이 살짝 비켜나 있던 것을 떠올렸는데, 그때는 그저 왕실 예법 시험 준비로 피곤한 탓이라 여기고 넘겼던 그 사소한 균열들이, 지금 와서 보니 하나하나 오늘 이 순간을 향해 쌓여온 조각들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데 네 옆에 있으면 나는 계속 지금 이대로일 것 같아서."
서윤의 눈빛에는 미안함 같은 것도 섞여 있었으나, 그 미안함이 오히려 도현의 가슴을 더 날카롭게 후벼 파고들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이미 이 결별을 오래전부터 계산해왔다는 증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더 나은 사람이라니…… 나와 함께 있는 게 그렇게 부족했던 걸까.'
그는 반박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그저 서윤의 입술이 다시 움직이기를,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잘못 들은 말이었다고 정정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는데, 그런 그의 바람은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달칵.
연회장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고, 화려한 예복을 입은 한 남자가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가 이내 다시 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보였는데, 도현은 그 얼굴이 낯익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이어갈 여유가 없었다.
문이 다시 닫히며 만든 그 짧은 소음이 사라지고 나자, 테라스에는 다시 두 사람만의 침묵이 내려앉았고, 정원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서윤의 치맛자락을 흔들며 지나갔는데, 그 자락이 부드럽게 흔들리는 모습조차 도현에게는 이제 낯설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데."
간신히 짜낸 물음에 서윤은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들어 도현을 똑바로 응시하며 낮고 명료한 목소리로 못을 박듯 말했다.
"왕국 제일의 미녀와 결혼할 수 있는 남자가 되기 전엔, 너는 내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
그 순간 도현은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느꼈고, 자신이 지금까지 알아온 서윤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낯선 타인처럼 멀어지는 것을 목격하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왕국 제일의 미녀…… 그런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남자가 되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야.'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서윤의 눈빛에 담긴 확신이 너무나 단단해서 도현은 그것이 단순한 이별의 변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고, 그 직감이 오히려 더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왕국 제일의 미녀라 불리는 존재는 매해 봄 연회가 끝난 뒤 왕실이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칭호로, 그 칭호를 얻은 여인은 이후 몇 해간 왕국 내 모든 혼사의 기준점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만큼 그 이름 옆에 나란히 서는 남자에게는 남다른 신분과 능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도현 역시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자신의 삶과 연결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서윤은 마치 그것이 이미 정해진 규칙인 것처럼, 그리고 자신은 그 규칙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는 듯 태연하게 그 이름을 입에 올리고 있었고, 그 태연함이 도현에게는 무엇보다도 낯설고 서늘하게 다가왔다.
서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몸을 돌려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녀의 뒷모습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도현은 자신의 두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목소리는 매번 목구멍 안쪽에서 걸려 넘어졌고, 결국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원의 밤바람이 테라스를 스쳐 지나갔고, 그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치는 순간에도 도현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문장만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자격이 없다니…….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연회장 안에서는 여전히 웃음소리와 악기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 화려한 소음 속으로 서윤이 완전히 섞여 들어가 더 이상 그녀의 뒷모습조차 구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도현은 비로소 자신이 무언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물음은, 도현이 앞으로 오랫동안 곱씹게 될 첫 번째 균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