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배, 굶지 좀 마요

4화

도시락은 어느새 매일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서아는 그 사실을 부정하려 했지만, 아침마다 벤치에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을 기다리게 됐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태민의 요리는 매일 조금씩 달랐다. 어느 날은 김치찌개와 밥, 어느 날은 오므라이스, 어느 날은 국수. 늘 정갈했고, 늘 그녀의 입맛에 맞았다. 월요일엔 계란말이가 유난히 도톰하게 말려 있었고, 화요일엔 그녀가 좋아하는 매운 소스를 곁들인 떡볶이가 나왔다. 수요일엔 아무 말 없이 우엉조림 대신 연근을 더 넣어 왔다. 서아는 그날 저녁, 자신이 우엉을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곱씹어봤다. 말한 적 없었다. 적어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 너, 내 입맛 조사한 거 아니야? — 그냥 감으로 합니다. — 감이 무슨 이렇게 정확해. — 부장님이 우엉조림 젓가락으로 밀어놓는 거, 처음 도시락 드릴 때부터 봤습니다. 서아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렇게 자세히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낯설고, 동시에 이상하게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태민은 대답 대신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사실 그는 그녀가 어떤 반찬을 남기고 어떤 반찬을 다 먹는지, 매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세심하게. — 왜 그렇게까지 신경 써. — 신경 쓰는 게 이상한가요. — 이상하지. 넌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말을 뱉고서야 서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태민의 표정이 아주 잠깐,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굳었다가 다시 풀렸다. — 그렇네요. 아무 사이도 아니죠. 그의 목소리엔 별다른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서아는 그 짧은 대답 뒤에 뭔가가 가라앉아 있다는 걸 느꼈다.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캐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관계에는 분명한 위험이 있었다. 선도부장이 1학년 후배와 매일 붙어 있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소문은 순식간에 퍼질 것이다. 선도부장의 권위는 곧바로 흔들릴 것이고, 서아가 지켜온 완벽한 이미지도 무너질 것이다. 실제로 며칠 전, 복도를 지나던 2학년 선배 하나가 두 사람을 흘낏 보고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 시선이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서아는 그날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군가 눈치챈다면. 누군가 입방아에 올린다면. 그 상상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 오늘부터는 다른 데서 만나. 서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태민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 왜요. — 여기 사람들 지나다녀. 누가 보면 곤란해. — 곤란한 게 뭔데요. — 넌 몰라도 돼. 딱 잘라 말하는 태도에 태민의 눈빛이 잠깐 차가워졌다. 그는 잠시 도시락 뚜껑을 만지작거리다가, 시선을 들지 않고 물었다. — 부장님은 항상 그렇게 말하네요. 몰라도 돼, 신경 쓰지 마, 넌 상관없어. — 사실이니까. — 사실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할 문제 아닙니까. 서아는 그 말에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태민이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지는 건 처음이었다. — 저랑 있는 게 부끄러운 겁니까. — 그런 게 아니라— 서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은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해져서, 남들에게 들키면 이 관계가 망가질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매일 아침 이 벤치에 앉는 시간을 기다리게 됐다는 걸, 그녀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들키는 순간,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이 흔들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 선도부장이라는 자리가, 원래 그런 거야. 사적인 거 하나도 못 만들어. — 그럼 저는 뭡니까. 그 사적인 것 중 하나입니까. 서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태민의 눈빛이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그녀를 향했다. — 저는 누구한테 기대하는 거 싫어합니다. 누구의 특별도 되고 싶지 않고요. 근데 이제 와서, 숨어서 만나라는 소리를 들으니까—기분이 별로 좋지 않네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서아는 그 말에서 낯선 종류의 상처를 느꼈다. 이 아이도, 자신처럼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예전에도 누군가에게 이런 취급을 받은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놓고 특별하다 말하지도 못하면서, 숨겨야만 하는 존재로 밀려났던 적이. — ...미안해. 서아가 먼저 사과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태민이 살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서아는 그 시선을 피하며 손끝으로 벤치 나무결을 매만졌다. — 근데 나도 어쩔 수 없어. 이 자리는, 내가 무너지면 안 되는 자리야. — 무너진다는 게 뭔데요. 밥 좀 챙겨 먹고, 사람 좀 만나는 게 무너지는 겁니까.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도 답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오랫동안, 완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짓눌려 살아왔을 뿐이었다. 실수 하나, 흠 하나만 보여도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전부 부서질 거라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도 이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벤치 위로 낮게 지나갔다. 나뭇잎 몇 장이 발치에 떨어졌다. 태민이 도시락 통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 드세요. 이건 자리랑 상관없으니까. 서아는 그 도시락 통을 한동안 바라봤다. 뚜껑에 맺힌 물기가 아침 햇살에 흐릿하게 빛났다. 그리고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오늘은 유부초밥이었다. 작고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모양들이 나란히 담겨 있었다. 하나하나 크기가 고르고, 위에 뿌려진 검은깨까지 균형이 잡혀 있었다. 한 입 베어 물자, 눈물이 핑 돌았다.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 게 스스로도 이상했다. 맛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짜지도 달지도 않은, 딱 알맞은 간이었다. 그런데도 목이 메었다. — 왜 울어요. — 안 울어. 하지만 눈가는 이미 붉어져 있었다. 태민은 아무 말 없이 그녀 옆에 앉았다. 벤치가 살짝 그의 무게로 기울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손바닥에서 옅은 온기가 퍼졌다. — 무너져도 돼요. 적어도 저 앞에서는. 서아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 말이 어떤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그녀는 바로 알아챘다. 이건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이건—이 아이가 자신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도 내주지 않았던 자리, 완벽해야만 서 있을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자리 옆에, 태민이 조용히 의자 하나를 놓아준 것 같았다. — ...너, 이런 거 함부로 말하면 안 돼. — 왜요. — 사람이... 기대게 돼. — 기대라니까요. 그 짧은 말에 서아의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졌다. 손을 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태민도 그걸 눈치챘는지, 잡은 손을 조금 더 감싸 쥐었다. 하지만 그 다정한 순간도 오래가지 못했다. 저 멀리서, 낯익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박또박, 점점 가까워지는 걸음이었다. 선도부 부원 중 한 명이었다. 서아는 반사적으로 손을 뺐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태민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 부원이 다가오며 소리쳤다. — 부장님! 여기 계셨네요, 찾고 있었— 말을 하다 멈춘 부원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와 표정을 훑고 지나갔다. 의아함이 스치는 눈빛이었다. 부원의 눈이 태민에게, 그리고 열려 있는 도시락 통에, 다시 서아의 붉어진 눈가에 차례로 머물렀다. 서아는 애써 표정을 다잡았다. 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부원이 뭔가를 눈치챈 듯,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 몇 초가, 서아에게는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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