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배, 굶지 좀 마요

1화

은강고등학교의 아침은 언제나 같은 온도로 시작됐다. 정문 앞에 선도부가 줄지어 서 있었고, 그 맨 앞에는 늘 같은 사람이 있었다. 윤서아. 2학년, 선도부장, 검도부 주장. 흐트러짐 없는 교복, 반듯하게 넘긴 머리, 곧게 편 등. 지나가는 학생들은 그 앞에서 저절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몇몇은 그녀를 보며 작게 인사를 건넸고, 몇몇은 아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서아는 그 모든 시선에 똑같은 무게로 답했다. 웃음도 아니고 무표정도 아닌, 정확하게 계산된 표정. 은강고에서 가장 신뢰받는 얼굴이었다. 강태민은 그 풍경을 곁눈으로 흘려보내며 걸었다.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게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었다. 등에 멘 가방 속에는 아무도 모르는 그만의 요리 도구가 몇 개 들어 있었다—어제 손질해 둔 칼, 랩에 싼 밑반찬. 아무에게도 보여줄 생각 없는, 순전히 그 자신을 위한 습관이었다. 가방끈을 고쳐 메며 그는 생각했다. 오늘 저녁엔 무를 조려야겠다고. 어제 사둔 무가 냉장고 안에서 딱 알맹이가 잘 익을 시간이었다. 그런 계산들이 그의 하루를 지탱했다. 사람보다 재료가 더 예측 가능했다. 재료는 배신하지 않았다. 교실로 가는 길, 그는 일부러 사람이 적은 뒤쪽 통로를 택했다. 늘 그랬다. 붐비는 정문 쪽 복도보다 이 길이 조용했고, 조용한 게 그에게는 편했다. 체육관 옆, 검도부 연습실을 지나칠 때였다. 쿵. 뭔가 무거운 것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발걸음이 멈췄다. 원래라면 그냥 지나쳤을 소리였다. 복도에는 흔히 있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뒤이어 들린 숨소리가 이상했다. 짧고, 가늘고, 억지로 참아내는 듣기 힘든 호흡. 사람이 아프거나, 무너지기 직전일 때 내는 소리. 태민의 발이 저도 모르게 방향을 바꿨다. 그는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연습실 구석, 윤서아가 벽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죽도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고, 입술은 살짝 갈라져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벽을 짚은 손끝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힘을 너무 많이 준 탓이었다. ‘저게 뭐야.’ 태민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학교에서 가장 완벽하다고 소문난 사람이, 지금 이 순간에는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그는 문틈에 붙어 선 채로,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서아는 벽을 짚은 손에 힘을 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후우—. 숨을 길게 내뱉었다. 한 번, 두 번. 폐 속에 남은 떨림을 전부 밀어내려는 듯한 호흡이었다. 그리고 죽도를 집어 들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등이 곧게 펴졌다. 무릎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것도 순식간이었다. 방금 전의 흔들림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듯, 완벽한 검도 자세로 돌아갔다. 태민은 그 전환의 속도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사람이 저렇게 빨리 자기 자신을 다시 조립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더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 순간, 복도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1학년 후배 몇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잘거리는 목소리와 가벼운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 부장님, 안녕하세요! 서아가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의 회백색 얼굴은 사라지고,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여유로운 표정이 자리했다. 마치 스위치를 켠 것처럼, 완벽하게. — 좋은 아침이야. 오늘도 지각하지 말고. 목소리마저 흔들림이 없었다. 후배 하나가 쭈뻣거리며 물었다. — 부장님, 오늘 저녁 훈련 늦게 끝나나요? — 평소랑 같아. 8시. 짧고 명확한 대답. 후배들이 웃으며 지나가자 그녀는 다시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주 잠깐,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주 짧게, 아무도 보지 못하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 짧은 순간에도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태민은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저 사람, 며칠째 저러고 있었던 거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남의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특별해지는 것도, 특별해지지 않는 것도, 그에게는 똑같이 위험한 일이었다. 사람은 기대를 걸면 무너진다. 그는 그걸 몸으로 배웠다. 몇 년 전, 아무도 없던 집에서, 아무도 오지 않는 저녁마다. 그는 발을 돌렸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다시 뒤를 돌아봤다. 서아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물통이었다. 은색의, 흔한 학교용 물통. 그녀는 물통을 흔들어 보더니, 표정 없이 다시 가방에 넣었다. 비어 있는 게 분명했다. 흔드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안에 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저런 소리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그녀는 책상 위—아니, 연습실 한쪽에 놓인 가방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도시락 통이 있었다. 뚜껑이 열린 채였다. 안에는 밥알이 몇 개 남아 있을 뿐, 거의 비어 있었다. 반찬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반찬이 있었던 흔적조차 희미했다. 하지만 며칠은 그대로 방치된 듯한 냄새가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상한 음식 냄새였다. 익숙한 냄새였다. 태민은 그 냄새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밑반찬이 상했을 때 나는 시큼한 냄새. 냉장 보관도 하지 않은 채 며칠 방치했을 때 나는 그 특유의 냄새. 태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걸 먹은 거야, 아니면 먹으려다 만 거야.’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저 사람은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 완벽한 얼굴 뒤에, 텅 빈 도시락통과 빈 물통을 숨기고 있다는 것. 그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지 않았다. 조용히 몸을 돌려 교실로 향했다. 발걸음은 평소와 같았지만, 머릿속에서는 방금 본 장면이 지워지지 않았다. 1교시가 시작되고, 교사의 목소리가 칠판 앞에서 울렸다. 태민은 노트를 펼쳐놓고도 글자를 눈에 담지 못했다. 창밖으로 검도부 연습실이 있는 건물이 보였다. 그는 몇 번이나 그쪽을 흘겨봤다. ‘내 일이 아니다.’ 몇 번이나 되뇌었다.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그는 그 문장을 되풀이했다. 급식실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그는 옆자리에 앉은 아이들의 말소리를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선도부장이 급식실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군가 그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그날 하루, 그는 평소보다 자주 창밖을 바라봤다. 수업 중에도, 복도를 걸을 때도, 그의 시선은 자꾸만 검도부 쪽으로 향했다. 마치 뭔가에 끌리는 것처럼. 방과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그는 마트에 들렀다. 평소보다 카트를 오래 끌었다. 무, 다시마, 멸치, 그리고 평소라면 사지 않았을 것들—죽 재료들. 흰죽에 넣을 야채와, 회복식에 어울리는 것들. 계산대 앞에 서서, 그는 카트에 담긴 것들을 내려다봤다. 평소보다 많은 양이었다. 너무 많은 양이었다. 그 자신도 몰랐다. 그 순간, 그가 몇 년간 지켜온 원칙에 첫 균열이 생겼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균열이, 앞으로 그를 어디로 데려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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