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초 고백, 평생 배신

4화

옥상에서의 대화 이후, 도윤은 이상하게도 서은과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도서관 구석, 같은 서가, 같은 시간대. 처음에는 우연이라 여겼지만, 세 번째로 겹치는 순간부터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도윤도 짐작할 수 있었다. 우연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도윤은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놓고도 답을 찾지 못한 채, 매번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창가를 바라보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창가 자리는 볕이 잘 들어서 도윤이 좋아하는 자리였는데, 서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매번 정확히 그 위치를 찾아왔다. "또 여기 있네." 서은이 책을 옆구리에 낀 채 다가와 앉았다. 도윤의 맞은편, 창가 자리였다. 서은의 걸음걸이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마치 이미 정해진 동선을 따라 걷는 사람처럼, 어느 자리에 앉을지 고민하는 기색조차 없이 의자를 빼고 앉는 그 태도가 도윤의 눈에는 조금 낯설게 다가왔다. "우연이야?" 도윤이 물었다. "글쎄." 서은이 대답을 흐리며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낡은 사진처럼 흐릿해 보였다. 도윤은 여전히 서은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 소라의 일이 있은 뒤로, 누군가의 다정함이 진심인지 계산인지 구분하는 일이 몹시 어려워졌다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다정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도윤은 몸으로 배운 셈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도서관의 정적을 얇게 갈랐다. 서은의 손끝이 종이 위를 스칠 때마다 나는 그 마른 소리가, 도윤에게는 묘하게 신경을 긁는 감각으로 다가왔다.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신경 써." 도윤이 결국 물었다. 목소리에 날이 섞여 있었다. 서은은 잠시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정지한 손가락 끝에서 시간이 잠깐 얼어붙는 듯했다. 서은은 그 짧은 침묵 동안 무슨 말을 고르고 있었는지, 도윤은 짐작할 수 없었다. "중학교 때." 서은이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말을 꺼냈다. "나도 비슷한 일 있었어."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기다림이라는 것도 일종의 압박이 될 수 있다는 걸, 도윤은 그 순간 처음으로 실감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서은의 어깨가 조금씩 굽어가는 것이 보였다. "친한 애가 있었어. 정말 친했다고 생각했는데." 서은의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그 애가,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 얘기를 하고 다녔더라. 나쁜 쪽으로." "어떻게." 도윤이 물었다. 서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을 다시 펼치며 화제를 돌렸는데, 그 회피가 도윤에게는 오히려 더 뚜렷한 상처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책을 펼치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감추려는 듯 서은은 곧바로 다른 페이지로 넘어갔지만, 이미 도윤의 시선은 그 손끝에 붙박여 있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도윤이 말했다. "고마워." 서은이 짧게 답했다.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창밖으로 노을이 내려앉는 시간이었다. 도서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붉은 빛이 서은의 옆얼굴을 물들였고, 도윤은 그 빛깔이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가면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노을은 매일 같은 색으로 지지 않았다. 오늘의 붉음은 유난히 짙어서, 서은의 뺨을 스치는 빛이 마치 상처 자국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도윤은 그 이미지를 오래 눈에 담았다. "너 말이야." 서은이 불쑥 물었다. "지금 모습, 계속 이렇게 있을 거야?" "무슨 뜻이야." 도윤이 되물었다. "안경, 머리, 옷차림." 서은이 손끝으로 도윤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꿀 생각 없어?" 도윤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그게 왜." "그냥 궁금해서." 서은이 웃었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달라질 수 있거든." 그 말이 단순한 조언인지,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는 서곡인지 도윤은 판단할 수 없었다. 쉽게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위로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경고일 수도 있었다. 서은의 어느 쪽에 서 있는지, 도윤은 여전히 가늠할 수 없었다. "넌 왜 달라지지 않았어." 도윤이 물었다. "너도 상처 있다면서." 서은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나는 이미 달라진 뒤였어.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말을 뱉는 서은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마치 오래전에 다 말라버린 우물 바닥을 긁는 소리 같았다. 그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서은은 책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갈게." 서은이 짧게 인사하고 도서관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윤에게는 그 작은 소리가 유난히 길게 남아, 귓가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것 같았다. 도윤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과거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이미 달라진 뒤였다는 말. 그 말은 도윤의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감겼다. 달라지기 전의 서은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 도윤이 알고 있는 서은은, 그 변화의 결과물일 뿐인 걸까. 도윤은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도서관의 냉방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스스로도 구분할 수 없었다. 창밖에는 이미 노을이 완전히 저물고 있었다. 붉은빛이 사그라들고 남은 것은 짙은 남색의 그림자뿐이었다. 도윤은 그 어둠 속에서, 서은이 감추고 있는 것이 자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된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며칠 후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도윤을 찾아오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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