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서울로 올라온 지 두 해가 다 되어가는데도, 나는 아직 저녁마다 냄비 뚜껑을 열 때 손끝으로 국물 온도를 가늠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전주에서 삼대를 이어온 한식당 '정가'의 막내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칼질과 간 보는 법을 몸에 새기듯 배웠으니, 이제 와서 그 감각을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자취방 부엌에서도 굳이 계량스푼 없이 손끝으로만 간을 맞추곤 했다. 할머니는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언제 내려올 거냐"는 말을 꼭 한 번씩 얹었고, 나는 그 말에 대답을 흐리며 화제를 돌리는 것으로 대신 답을 피했다. 종가의 부엌은 내게 너무 크고, 그 안의 규칙은 너무 오래된 것이었으니까.
큰언니는 이미 그 규칙 안에서 완벽하게 자리를 잡은 사람이었다. 열아홉 살 때부터 할머니 옆에서 육수 내는 법을 배웠고, 스물다섯이 된 지금은 주방을 통째로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결국 서울로 도망치듯 올라와 회사에 취직했다. 요리를 놓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요리가 누군가의 대를 잇는 무게로 얹히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손끝은 여전히 예전 습관을 따라 움직였고, 나는 그게 스스로도 조금 웃겼다.
내가 사는 다세대주택은 서울 변두리, 언덕 하나를 낀 좁은 골목 안쪽에 있었다. 3층짜리 건물에 층마다 세 세대씩 붙어 있는 낡은 구조였는데, 계단 난간은 페인트가 벗겨져 손을 짚을 때마다 서늘한 철 냄새가 났고, 복도 센서등은 반쯤 나가 있어 밤이면 3층 복도의 절반이 늘 어두웠다. 나는 302호였고 바로 옆인 301호에는 얼마 전부터 누군가 이사를 온 모양이었다. 인기척이라곤 거의 없어서 처음엔 빈방인가 싶었는데, 어느 날 새벽 배달 오토바이 소리에 잠이 깨 창밖을 내다보다가, 편의점 봉투 하나만 달랑 든 채 계단을 오르는 그녀를 처음 보았다.
마른 몸이었다. 그냥 마른 게 아니라, 손목이며 목덜미의 선이 지나치게 얇아서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해지는 종류의 마름이었고, 낯빛은 형광등 아래에서도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비쳤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은 끝이 부스스했고, 걸음걸이는 계단 한 칸을 오를 때마다 아주 조금씩 흐트러졌다. 나는 그때 계단 난간에 손을 얹은 채로 잠깐 그녀를 내려다보았는데, 그녀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보았고,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눈빛이 이상하게 텅 비어 있었다. 감정이 없다기보다는, 감정을 어디 깊은 데에 넣어두고 잠가버린 사람의 눈이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짧게 고개만 까딱하고는 301호 문을 열고 들어가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조심스러웠고, 나는 그 조심스러움이 어쩐지 마음에 걸려서 한동안 계단에 서 있었다. 문패도 없고, 우편함에도 이름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그저 301호라는 숫자만 덜렁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녀의 생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버릇이 생겼다. 딱히 궁금해서라기보다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사람의 존재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신경이 쓰였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녀는 새벽에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왔고, 요리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대신 가끔 물 끓는 소리와 컵에 뭔가를 따르는 소리만 들려왔다. 어느 밤엔 그 컵 소리 사이로 아주 작게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섞여 들리기도 했는데, 나는 그 소리에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벽 쪽으로 귀를 조금 더 가까이 대었다가, 이내 그러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져 도로 몸을 돌렸다. 나는 편의점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으로 저녁을 대신하는 사람인가 짐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가다가 301호 앞에 쌓인 재활용 쓰레기를 지나치게 되었는데, 그 안에 든 게 페트병 몇 개와 즉석밥 껍데기 몇 장이 전부였다. 일주일치 쓰레기라고 보기엔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었고, 나는 그걸 보는 순간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 봉투를 들고 서서 그 안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라면 봉지 하나, 물병 두 개, 즉석밥 용기 세 개. 그게 전부였다. '저것만 먹고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나는 그 생각을 고개 저어 지워버렸다. 남의 사정에 함부로 끼어드는 건 종가에서 배운 예의범절과도 맞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할머니는 늘 "밥상머리에 함부로 오지랖 부리지 말라"고 했다. 남의 그릇에 뭘 얼마나 담아 먹는지는, 그 사람의 사정이라고.
하지만 그날 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많은 양의 나물 무침과 된장국을 끓였다. 냉장고에 있던 시금치와 콩나물을 데치고, 멸치 육수를 우려 된장을 풀면서도, 나는 계속 손이 평소보다 크게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그냥 재료가 남아서였다고 나 자신에게 말해두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국을 담은 냄비 뚜껑을 덮으며 나는 창문 너머로 301호 쪽을 흘깃 바라보았고, 그 방의 불빛이 유난히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불빛은 마치 배터리가 다 된 손전등처럼 힘없이 깜박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릇에 국을 반쯤 나눠 담아 랩을 씌워두었다가, 다시 그걸 냉장고에 넣고 문을 탁 닫았다. 막상 문을 두드려 건넬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던 것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사람에게 밥그릇을 들이미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오지랖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 같았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지만, 잠들기 전까지도 벽 너머의 정적이 자꾸만 신경에 걸렸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출근길에 나서다가 계단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계단 두 칸을 채 못 내려가고 벽을 짚은 채 잠깐 멈춰 서 있었는데, 숨을 고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깨는 미세하게 떨렸고, 이마에는 식은땀 같은 것이 살짝 배어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괜찮으세요?"
그녀는 대답 대신 벽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고, 다리가 살짝 휘청였다.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는데, 손끝에 닿은 팔이 놀랄 만큼 가벼워서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마치 뼈만 잡은 것 같은 감촉이었다. 옷소매 아래로 만져지는 팔뚝의 얇기가, 순간 내가 아는 어떤 무게와도 맞지 않아서, 손끝에 남은 감각이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녀가 낮게 말하며 내 손을 조용히 뿌리쳤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눈동자만은 아주 잠깐 흔들렸고, 나는 그 짧은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뿌리치는 손길에는 힘이 거의 없었는데도, 그 안에 담긴 거절의 의지만은 또렷했다. 마치 도와달라는 말과 도와주지 말라는 말을 동시에 담고 있는 손 같았다.
"저... 밥은 챙겨 드세요?" 나는 물으면서도 이게 얼마나 뻔한 질문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깐 나를 보더니, 대답 없이 입술만 살짝 다물었다. 그 침묵이 어떤 대답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했다. 뒷모습마저도 옆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고, 한 칸 한 칸 내려가는 발소리는 유난히 조심스러워서 마치 계단이 무너질까 봐 겁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뭔가가 이상했다. 그저 마른 대학생이라고 넘길 수 없는 종류의 이상함이었고, 나는 그 이상함의 정체를 아직 알지 못했다.
출근길 버스 안에서도 나는 계속 그 팔의 감촉을 떠올렸다. 손끝에 남은 서늘하고 가벼운 느낌이 자꾸만 되살아났고, 나는 그게 단순한 마름이 아니라 뭔가 더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사람의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냉장고 안에 넣어둔 국그릇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오늘 저녁에는, 문을 두드릴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나는 그 답을 스스로도 아직 알지 못한 채로,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