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짝사랑은 오해로 핀다

4화

일주일이 지나는 사이, 이하준의 조용했던 일상에는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 느리지만 분명하게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점심시간에도 창가 자리에 홀로 앉아 책장을 넘기며 흘려보냈을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강서윤이 마치 처음부터 정해진 자리인 양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걸어오는 일이 잦아졌고, 하준은 그것을 그저 그녀 특유의 배려 넘치는 우정이라 여기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거 매점에서 사 왔는데, 너 좋아할 것 같아서." 서윤이 빵 하나를 책상 위에 툭 올려놓으며 말했다. 딸기잼이 든, 하준이 예전에 무심코 좋아한다고 흘리듯 말했던 그 빵이었다. 하준은 그녀가 그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잘 먹을게." "별거 아니야." 서윤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지만, 사실 그 빵을 사기 위해 쉬는 시간 십 분을 매점 줄에서 기다렸다는 사실은, 그리고 계산대 앞에서 하필이면 그 빵이 딱 하나 남아 있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급해졌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빵 봉지를 뜯는 하준의 손끝을 서윤은 곁눈질로 슬쩍 훔쳐보았다. 별것 아닌 손짓인데도 이상하게 눈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 "맛있어?" "응, 맛있어." "당연하지, 내가 골라준 건데." 서윤이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들자, 하준은 작게 웃으며 다시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 웃음 하나에 서윤의 가슴 어딘가가 슬쩍 들뜨는 것을, 그녀는 애써 모른 척했다. 서윤은 이 모든 행동을 '공략'이라는 단어로 스스로에게 정당화하고 있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하준이 자신에게 확실히 넘어오는 순간이 필요했고, 그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되뇌었다. 캔커피를 사고, 빵을 나눠주고, 도서관에서 나란히 앉아 책을 읽는 시간이 하루하루 쌓여갈수록, 서윤은 스스로에게 '이건 다 계획의 일부야'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되풀이할수록 오히려 그 말이 점점 헛헛하게 들린다는 사실이었다. 정작 그녀 자신이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을, 서윤은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걸어볼지 미리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도, 하준의 시간표를 굳이 외워서 쉬는 시간마다 그 반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는 것도, 전부 '공략'이라는 이름 아래 조용히 숨겨두고 있었다. 한편 박소연과 김유나는 서윤의 변화를 심상치 않게 지켜보고 있었다. "강서윤 요즘 왜 저래?" 유나가 복도 모퉁이에서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이하준한테 무슨 볼일 있어? 아니, 볼일이 있어도 저 정도로 붙어 다닐 일은 아니잖아." "설마 진짜로 좋아하는 거 아니야?" 소연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야, 강서윤이 누구 좋아한다고 저렇게 티 내고 다닐 애가 아니잖아. 저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그럼 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근데 촉이 좀 이상해." 유나는 팔에 오소소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촉이 되게 이상하다니까." 두 사람의 웅성거림은 아직 서윤의 귀에까지 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감춰질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복도를 지나는 다른 아이들의 시선도 하나둘씩 서윤과 하준을 향해 머무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하준이 조용히 지내려던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작은 시도가 있었다. 방과 후, 다른 아이들이 모두 교문을 빠져나간 시각의 도서관은 유독 조용했고, 책장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이 먼지 한 톨까지 선명하게 비추는 그 공간에서 하준은 오랜만에 예전 같은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감각. 그 익숙한 고요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하준은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때, 도서관 문이 조심스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준이 시선을 들기도 전에, 서윤이 곧장 그의 맞은편 자리로 걸어와 아무렇지 않게 앉았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서윤이 웃으며 말했다. 하준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도 왔네." "방해되면 갈까?" 서윤이 짓궂게 묻자, 하준은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었다. "아니, 괜찮아. 너 오면 나름 재밌어." 그 말에 서윤의 가슴이 순간 이상하게 뛰었다. 재밌다는 말이, 그저 친구로서 하는 말인 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목 안쪽이 살짝 조여드는 감각과 함께, 서윤은 괜히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손끝을 매만졌다. '이건 그냥 공략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신호야.' 그녀는 그렇게 애써 생각을 정리했지만, 도서관 창문으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 아래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처음으로 계획이 아닌 진짜 감정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답지 않게 왜 이래.' 서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동장 저편에서 축구를 하는 남학생들의 함성이 아득하게 들려왔지만, 그 소리마저도 지금 이 순간에는 배경처럼 흐려지고 있었다. 오직 맞은편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하준의 손끝과, 가끔씩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무심하게 넘기는 그 손짓만이 서윤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저기." 서윤이 문득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며,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너는 진짜로, 내가 왜 그때 고백했는지 안 물어봐?" 하준은 책을 덮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생각보다 오래, 생각보다 깊게 서윤에게 머물렀다. 도서관 특유의 정적 속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도 잦아든 그 짧은 침묵 사이로, 하준의 눈빛에 담긴 궁금증이 서윤의 심장을 조용히 조여오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 참아왔던 질문을 이제야 꺼내려는 사람처럼, 하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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