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한빛고등학교 2학년 3반 교실 뒤편, 창가 쪽 자리에서 시작된 휴대폰 게임 하나가 오늘 하루의 운명을 이렇게까지 뒤틀어놓을 줄은, 강서윤도 미리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던 그 나른한 오후, 형광등 아래로 밥 냄새와 웃음소리가 뒤섞여 흐르던 교실 안에서, 박소연과 김유나는 휴대폰을 마주 대고 앉아 리듬 게임 하나를 켜놓고는 점수가 가장 낮게 나온 사람이 벌칙을 받는다는 규칙을 즉석에서 만들어냈는데, 그 벌칙이라는 것이 다름 아니라 반에서 가장 존재감 없는 남학생에게 가서 고백을 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누가 봐도 짓궂고 유치한 내용이었다.
"자, 시작한다." 유나가 손가락을 화면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소리쳤고, 소연은 이미 웃음을 참지 못한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세 번의 라운드가 끝난 뒤, 화면에 뜬 점수를 확인한 두 사람은 동시에 서윤을 바라보며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야, 강서윤 이거 완전 재밌겠다." 유나가 눈물까지 찍어내며 웃었고, 소연은 이미 교실 저편, 창가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이하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 저 이하준, 딱 좋네. 존재감 하나도 없잖아. 말 한 번 섞어본 애들도 없을걸."
서윤은 처음엔 팔짱을 낀 채 시큰둥하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 유치해." 하지만 소연이 곧바로 지난주 만들어놓은 규칙표를 들이밀며, 벌칙을 거부하면 다음 주 매점 셔틀을 도맡아야 한다는 조항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고, 매점 셔틀이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은 상상 이상으로 크게 다가왔다. 서윤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결국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어차피 장난이니까, 상관없어. 서윤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하준의 자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실내화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고, 등 뒤로는 벌써부터 몇몇 아이들이 무슨 재밌는 구경거리가 났나 싶어 목을 길게 빼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한빛고등학교에서 강서윤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가진 무게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복도를 지나가기만 해도 남자아이들은 은근슬쩍 시선을 돌렸고, 여자아이들은 부러움과 동경이 섞인 눈으로 그녀를 좇았다. 그런 시선들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기에, 서윤은 자신이 다가가면 하준 역시 당연히 그 흐름을 따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하준은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빛이 그의 손등 위에 얇게 내려앉아 있었고, 책장을 넘기는 손끝은 느리고 조용했다. 서윤이 바로 앞까지 다가섰는데도 그는 마치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사람처럼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이하준." 서윤이 부르자,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무심한 눈빛에는 놀라움도 설렘도 없이, 그저 평범한 호기심 정도만이 담겨 있어서, 서윤은 순간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늘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들과는 온도가 확연히 달랐다. 마치 반 친구가 우연히 지나가다 인사를 건넨 것 같은, 딱 그 정도의 무게였다.
"나 좋아해?"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툭 던진 말에, 교실 안 몇몇 아이들이 숨죽인 웃음을 흘렸고, 소연과 유나는 뒤에서 터지려는 웃음을 손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벌칙 수행이었다. 대답은 뻔했다. 당황하거나, 얼굴을 붉히거나, 말을 더듬거나. 서윤은 이미 그 반응까지 예상하며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속으로는 하준이 얼마나 우스운 표정을 지을지 지켜볼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이하준은 웃지 않았다.
그는 읽고 있던 책을 천천히 덮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고, 잠시 서윤의 얼굴을 살피듯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얼굴에서 눈으로 옮겨가는 짧은 순간, 서윤은 이상하게도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준은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거, 진심으로 묻는 거야?"
서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심이지." 사실은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벌칙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뒤에서 소연과 유나가 숨을 참고 있는 게 느껴졌고, 그 침묵조차 그녀를 더 밀어붙이는 듯했다.
"그렇다면." 하준은 잠시 침묵한 뒤, 아주 정중하고도 단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강서윤을 그런 감정으로 좋아하지 않아. 우리는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고,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 그런 상태에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진심으로 느껴지지가 않아서, 받아줄 수가 없어."
그의 말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 둔 대답을 그대로 꺼내놓는 것처럼 정갈했고, 그 정갈함이 오히려 듣는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교실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누군가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정적이 흘렀고,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서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거절을 당해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애초에 거절이라는 단어가 자신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는 잠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녀 자신조차 그 떨림을 알아채지 못했다.
뒤편에서 소연과 유나의 웃음이 완전히 멈춰버린 채, 두 사람의 눈이 서로를 향해 빠르게 오갔다. 이건 예상한 그림이 아니었다. 존재감 없는 남학생이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런 우스운 장면을 기대했을 뿐인데,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정중하지만 명백한 거절이었고, 그 거절의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강서윤이었다.
교실 여기저기서 몇몇 아이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저거 지금 거절당한 거야?" "미쳤다, 진짜." 낮은 목소리들이 파도처럼 번져나가는 걸 서윤도 분명히 듣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 소리들을 처리할 여력조차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고, 명치 어딘가가 이상하게 꽉 막혀오는 감각만이 선명했다.
"……뭐?" 서윤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흔들리며 흘러나왔다.
하준은 그 물음에 별다른 대답 없이,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 손짓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이 순간이 그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느껴졌고, 그 태연함이야말로 서윤의 속을 뒤집어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철저히 무시당한 적 없던 그녀였기에, 이 낯선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입을 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