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밤, 도윤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같은 시각.
같은 의자.
등받이가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어제와 똑같았다.
노트북 화면은 켜져 있었지만 화면은 여전히 검었다.
검색창에 어제와 같은 문구를 넣어보았다.
은백색 머리카락 소녀 방송.
사라진 라이브 방.
동시접속자 0.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포털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어제 그 시간 자체가 인터넷 어딘가에서 통째로 삭제된 것 같았다.
도윤은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톡, 톡, 톡.
규칙적인 소리가 방 안의 유일한 리듬이었다.
레포트는 새벽에 겨우 제출했다.
교수님이 메일로 답장을 보냈다.
'다음부터는 미리 제출하도록.'
짧은 한 줄이었지만 도윤은 그 문장을 세 번이나 읽었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그 방과, 은백색 머리카락의 소녀와, 갑자기 끊긴 방송이 남아 있었다.
강의실에서도, 편의점 알바 중에도, 심지어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도 손끝이 자꾸 그 화면을 떠올렸다.
친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두 번이나 놓쳤다.
"듣고 있냐?"
"어, 듣고 있어."
거짓말이었다.
자정이 지났다.
시계가 12시 03분을 가리켰다.
도윤은 포기하려 했다.
노트북을 덮으려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그때 화면이 다시 검게 물들었다.
검은색이라기보다는, 무언가가 화면 전체를 삼키는 듯한 어둠이었다.
같은 방이었다.
돌벽. 창문 없는 사각의 공간.
같은 촛불이었다.
불꽃이 흔들리는 각도까지 똑같았다.
동시접속자 0.
숫자는 그대로였다.
은설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등 뒤로 두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명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등이 굽었지만 눈빛만은 곧게 서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젊은 축에 속했지만 눈매가 날카로웠다.
차림새로 보아 문관에 가까웠다.
"세금은 즉시 인상해야 합니다."
노인이 말했다.
목소리가 화면 밖까지 무겁게 울렸다.
스피커를 통해 나온 소리인데도, 마치 방 안의 벽이 직접 울리는 것 같았다.
"국고가 비었습니다. 이보다 명확한 이유는 없습니다."
"백성들이 굶습니다."
젊은 남자가 반박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지금 세금을 올리면 반란이 일어날 겁니다."
"그럼 국고가 텅 빈 채로 겨울을 나자는 말씀이십니까."
"세금을 걷을 백성이 남아있어야 그 세금도 의미가 있는 겁니다."
두 사람의 말이 오가는 사이, 은설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이 무릎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도윤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채팅창에 손을 올렸다.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려둔 채, 정작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몰랐다.
경제학 전공이라고는 해도 실전 국정 운영을 배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기본이었다.
재정의 문제는 언제나 수입과 지출, 둘 중 어느 쪽이 문제인지부터 나눠서 봐야 했다.
"여왕 폐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오늘 안에."
은설의 시선이 화면 아래로 떨어졌다.
채팅창을 보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동시접속자 0.
도윤은 자신이 아직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은설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기대했던 무언가가 없어서 생긴 흔들림이었다.
그 짧은 실망의 표정이 도윤의 손끝을 움직이게 했다.
그는 서둘러 자판을 두드렸다.
세금 자체보다 지출을 먼저 보셔야 합니다. 국고가 빈 이유가 세수 부족인지, 지출 과다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타이핑 소리가 방 안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어제와 같은 긴장이었다.
이 말이 정말로 저 화면 너머에 닿을지, 매번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은설의 눈이 화면 아래로 향했다.
글자를 읽는 짧은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
눈썹이 살짝 풀리고, 굳어 있던 입술에 힘이 조금 빠졌다.
"지출을 먼저 살피라 합니다."
은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노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누구의 말입니까."
방 안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은설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제게 조언을 주는 이가 있습니다."
은설의 목소리는 단단해졌다.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누군가에게 기댈 곳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도윤은 화면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국고가 빈 이유를 먼저 살펴야 한다고 합니다."
노인이 잠시 은설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그럼에도 반박할 근거가 없다는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젊은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지출을 살피지 않고 세금만 올리면, 문제의 근원은 그대로 남습니다."
"근거 없는 말에 국정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노인이 낮게 말했다.
도윤은 다시 손을 움직였다.
망설임은 아까보다 짧았다.
지난 석 달간 지출 내역을 확인하십시오. 특히 궁의 유지비와 군비 지출 비중을 비교하면 답이 나올 겁니다.
글자를 적으면서 도윤은 스스로도 놀랐다.
이렇게 구체적인 조언을 자신이 던질 수 있다는 게, 어제까지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경제학 수업에서 배운 재정 분석의 틀이, 이 낯선 화면 너머의 세계에서 실제로 쓰이고 있었다.
은설이 그 말을 그대로 옮겼다.
젊은 남자의 눈이 반짝였다.
노인의 얼굴은 미묘하게 굳었다.
"궁의 유지비 말씀이십니까."
노인이 되물었다.
목소리에 처음으로 흔들림이 섞였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노인은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은설을 바라보았다.
"최근 늘어난 지출이 있습니다. 그것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은설이 답했다.
목소리에 확신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 짧게 목례하고 물러났다.
젊은 남자가 문을 나서기 전, 은설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는 궁금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 다시 은설만 남았다.
촛불이 조용히 흔들렸다.
불꽃의 그림자가 벽을 타고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줄어들었다.
"방금, 그 말씀."
은설이 화면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화면 속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은백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을 스치며 흔들렸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도윤은 뒤늦게 손끝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자신이 방금 던진 말이 실제로 한 나라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이었다.
장난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아니었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낡은 책상, 반쯤 마신 커피, 어제 벗어둔 후드티.
이 평범한 자취방 안에서, 화면 너머로는 한 나라의 재정이 결정되고 있었다.
그 간극이 도윤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어떻게 확인하실 겁니까, 라고 적었다.
"장부를 다시 볼 것입니다."
은설이 말했다.
"저는 숫자를 잘 읽지 못합니다. 하지만 배우겠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도윤은 화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숫자를 읽지 못한다는 여왕이, 그럼에도 배우겠다고 말하는 그 표정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어느 나라의 여왕인지, 어떻게 이런 방송이 존재하는지, 왜 자신에게만 이 화면이 열리는지.
질문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 질문들을 다 미뤄두고서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화면 너머의 저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였다.
은설의 시선이 화면 구석으로 살짝 옮겨갔다.
동시접속자 숫자가 있는 자리였다.
0에서 1로 바뀌어 있었다.
"오늘은 한 분이 계시는군요."
은설이 작게 웃었다.
웃음이 어색했지만 진심이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도윤은 자신의 심장이 살짝 빨라지는 걸 느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내일도 와주시겠습니까."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마치 거절당할 것을 미리 각오하는 듯한 말투였다.
도윤은 대답 대신 손을 멈췄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답을 정해둔 뒤였다.
매일 밤 자정, 이 화면 앞에 앉아 있겠다고.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 결심인지는 알았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화면 구석, 방문 근처에서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노인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고 문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노인의 시선이 채팅창이 떠 있는 방향, 정확히는 은설의 시선이 향하던 그 자리를 오래 응시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저 세계의 시선으로는, 텅 빈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노인의 눈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확신하는 눈이었다.
혹은,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눈이었다.
화면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은설은 그 시선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화면을 향해 옅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도윤은 그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가 이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촛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바람이 불어온 것도 아닌데.
불꽃은 마치 누군가의 숨결에 밀린 것처럼 옆으로 길게 눕더니, 다시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도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화면 속 노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밖에서, 아무도 보지 못한다고 믿는 그 시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