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샹들리에 불빛이 유난히 노랗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대현국 왕궁, 매년 열리는 겨울 연회. 온성 후작가의 외동딸인 나, 서연은 오늘도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또 이 짓이네.'
스물몇 번째인지 세다 말았다. 전생에 회사에서 하던 야근보다 이게 더 피곤하다는 걸 알게 된 건 이 몸으로 눈을 뜬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전생의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십 대 후반의 직장인이었다.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억이 흐릿했다. 야근 때문이었나, 과로사였나. 뭐 그런 거였을 거다. 다만 눈을 떴을 때 나는 온성 후작가의 갓난아기였고, 그다음부터는 그냥 서연으로 살았다.
열아홉 해를 그렇게 살아왔다. 남의 인생을 빌려 입은 옷처럼.
가끔은 이 옷이 꽤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아무리 입어도 어색한 남의 옷 같기도 했고.
오늘은 후자였다.
발이 아팠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세 시간째 서 있으면 누구라도 발이 아플 거다. 전생이었으면 진작 벗어 던지고 맨발로 앉았을 텐데, 여기서는 그럴 수 없었다. 영애는 발이 아파도 웃어야 하니까.
'참 대단한 직업이다, 영애라는 거.'
무급에 야근 수당도 없고 퇴사도 안 되는 직업.
"영애님, 표정이 좀 굳으셨어요."
옆에서 속삭이듯 말을 건 건 소은이었다.
소은은 백작가의 셋째 딸로, 열두 살 때부터 내 곁에서 시중을 들어온 전속 시녀였다.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는 아이였는데, 그 능력 때문에 귀족가에서 오히려 눈총을 받아 어린 나이에 우리 가문으로 보내졌다고 들었다.
능력자를 곁에 두는 게 부담스러웠던 걸까, 아니면 무서웠던 걸까. 아무튼 백작가는 열두 살이던 셋째 딸을 서둘러 우리 가문으로 보냈고, 소은은 그때부터 줄곧 내 곁을 지켰다. 내게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긴장돼서 그래."
나는 부채를 살짝 펼치며 대답했다.
'긴장은 무슨, 지겨워서 그렇지.'
속으로는 딴소리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우아한 미소를 유지했다. 이 정도 낙차는 이제 익숙했다. 열아홉 해나 해왔으면 도가 트일 만도 하지.
소은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내 속을 읽었을 거다. 저 아이는 눈치가 빨랐다.
"영애님도 참…."
"뭐가."
"아니에요."
소은이 웃음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저 반응, 딱 봐도 '또 저러시네' 하는 표정이었다.
연회장 안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현악기 소리, 잔 부딪히는 소리, 귀족들이 서로 안부를 묻는 척 뒷담화를 나누는 소리. 나는 그 소음 속에서 부채를 팔랑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연회장 저편에서 재하 왕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대현국의 제2왕자이자 나의 약혼자. 우리는 다섯 살 때부터 정혼 관계였다. 정치적 이유로 맺어진 사이였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는 무난했다. 적어도 오늘 전까지는.
솔직히 말하면 재하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정략혼치고는 예의도 바르고, 가끔 진심 어린 안부도 물어오는 편이었다. 물론 사랑 같은 건 없었다. 정치적 결합에 사랑을 기대하는 건 순진한 짓이니까.
"서연 영애."
그가 내 앞에 멈춰 서며 인사를 건넸다.
"전하."
나는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의 눈빛이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를 보고는 있는데 마치 벽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뭐야, 이 눈빛은.'
등에 식은땀이 살짝 배어 나왔다.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의 눈빛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었다.
몇 초 사이의 정적이었지만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눈 밑이 살짝 그늘져 있었다. 잠을 못 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오늘 연회, 즐기고 계십니까."
그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에도 온기가 없었다.
"네, 전하께서도 즐거우신지요."
나 역시 형식적으로 답했다. 이런 대화는 십 년 넘게 해왔으니 입이 알아서 움직였다. 머리는 딴생각을 하고 있어도 입은 정확히 정해진 대사를 뱉어냈다.
'뭐지, 이 사람 오늘 좀 이상한데.'
그가 짧게 웃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왕과 왕비가 있는 단상 쪽으로.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봤다. 걸음걸이도 평소보다 빨랐다. 마치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소은이 내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영애님, 지금… 전하께서 무언가 되게 불편해하고 계셨어요. 죄책감 같은 것도 좀 섞여 있고요."
"죄책감?"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뭔 죄책감. 나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나.'
생각해보니 최근 들어 재하를 마주치는 횟수 자체가 줄었다. 원래도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최근 두 달은 유독 뜸했다.
처음엔 그저 바쁜가 보다 했다. 왕자라는 자리가 한가한 자리는 아니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바쁘다는 핑계치고는 좀 이상했다. 서신도 뜸했고,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는 일조차 줄어들었으니까.
"소은아."
"네, 영애님."
"혹시 요즘 궁 안에 무슨 소문 같은 거 없었어?"
소은이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딱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요즘 전하 쪽 시종들이 좀 예민해 보이긴 했어요."
'예민해 보인다라.'
뭔가 있다는 뜻이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단상 쪽을 힐끗 봤다. 왕비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왕비의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서늘했다. 마치 값을 매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저 눈빛은 또 뭔데.'
등골이 서늘해졌다. 부채를 쥔 손끝이 살짝 떨렸다.
왕비와 나의 인연은 얕지 않았다. 재생 능력을 가진 나는 몇 년 전, 사냥터에서 왕비가 크게 화상을 입었을 때 치료를 도운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왕비는 종종 나를 불러 사소한 상처들을 치료받곤 했다. 딱히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적대적인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저 눈빛은 뭔가 달랐다. 마치 나를 두고 무언가를 저울질하는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설마 재하 쪽에 무슨 일이 있나.'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가능성을 굴려봤다. 파혼? 그럴 리가. 정략혼인데 그렇게 쉽게 깨질 사이였으면 애초에 다섯 살 때 맺어지지도 않았을 거다.
그럼 뭐지.
왕비가 살짝 손짓을 했다. 시종 하나가 다가가 귓속말을 나누더니, 이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온성 영애님, 왕비마마께서 잠시 뵙고 싶다 하십니다."
'올 게 왔구나.'
나는 부채를 접으며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소은을 힐끗 돌아봤다. 그녀의 얼굴에도 옅은 긴장이 서려 있었다.
"영애님…."
"괜찮아. 가보고 올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단상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 왕비의 눈빛은 여전히 나를 겨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