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귀한 몸인데 왜 가정부라니

5화

왕도로 떠나기 전날, 나는 청연성 소속 마법 담당관이라는 여성 앞에 앉아있었다. 방 안엔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약초 냄새 같기도 하고, 오래된 책 냄새 같기도 한, 뭔가 '마법사의 연구실입니다'라고 써 붙인 듯한 그런 냄새. 탁자 위엔 정체 모를 유리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중 하나엔 눈알처럼 생긴 게 둥둥 떠 있어서 나는 최대한 시선을 피했다. 서은하가 정식 절차라며 데려온 자리였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서은하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서 있었고, 담당관이라는 여성은 안경 너머로 나를 훑어보는 눈빛이 꼭 '이 손님, 신용카드 한도 초과인가?'를 확인하는 은행 창구 직원 같았다. "마력 측정을 좀 해보겠습니다." 담당관이 수정구 같은 걸 꺼내며 말했다. "손을 여기 올려주세요." 수정구는 생각보다 컸다. 농구공만 한 크기에, 안쪽에서 뭔가 은은하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꼭 노래방 조명 같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 손을 올렸다. 수정구가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반짝. 딱 한 번 깜빡이고 끝났다. 솔직히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기대하고 있었다. 전생 게임 지식으로 치면 이런 장면은 보통 '숨겨진 잠재력 각성!' 같은 이벤트로 이어지는 게 국룰 아닌가. 빛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다거나, 수정구가 쨍 하고 깨진다거나. 그런 거 하나도 없었다. 그냥 딱 한 번, 반짝, 그리고 끝. 담당관의 표정이 굳었다. "...저기, 이거 고장 난 거 아니에요?" 내가 묻자 담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확하게 측정됐습니다." "근데 왜 저래요?" 담당관이 손에 든 작은 수첩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한 번 더 확인했다. 세 번째로 확인했을 때쯤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측정치가... 거의 0에 수렴합니다." 순간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밖에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삐약삐약, 인지 짹짹인지 모를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0이요?" "네. 정확히는 평민 최저 기준치의 십분의 일 수준입니다. 이건... 사실상 마력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치예요." 그럴 리가. 마력이 없다니. 이거 완전 게임으로 치면 '전투 불가' 뜨는 캐릭터잖아. 스탯 창 열어보면 마력 칸에 그냥 '-'만 떠 있는 그런 거. 서은하의 표정도 살짝 굳었다. "...확실한가?" "세 번 재측정했습니다, 단장님. 오차 없습니다." 담당관이 수정구를 다시 한번 흔들어 보였다. 여전히 딱, 반짝, 끝. 방 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머리를 싸매쥐고 싶었지만,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제 그 위기 상황에서도 나는 검 한 번 휘두른 적이 없다. 그냥 천 조각 정리하고, 부상자 눕히고, 빨래 건조대로 괴물 입을 막았을 뿐이다. 그게 다 마력이 아니라 순수 물리력과 손재주였다는 얘기다. 돌이켜보면 오러니 방어막이니 하는 화려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세탁소 사장님 손놀림으로 세상을 구한 셈이다. "기사가 되려면 마력이 필수 아니에요?" 내가 묻자 담당관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보통은... 그렇습니다. 마력이 있어야 검에 오러를 두르거나, 방어 마법을 걸거나, 전투 지속력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저는..." 말끝을 흐리는데, 서은하가 손을 들어 나를 멈춰 세웠다. "섣불리 결론 내리지 마라." "하지만 마력이 없으면..." "네가 어제 보여준 그 힘은 마력으로 설명되는 게 아니었다." 서은하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수십 명의 기사를 봐왔다. 마력이 강한 자, 검술이 뛰어난 자, 통솔력이 좋은 자. 하지만 너처럼 순수하게 '돌봄'과 '정리'와 '대비'만으로 위기를 넘기는 자는 처음 봤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게... 쓸모가 있을까요?" "쓸모가 있냐 없냐는 지금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서은하가 딱 잘라 말했다. "청연성 기사단에는 전투 담당만 있는 게 아니다. 보급, 의무, 병참, 정보. 이 모든 영역이 있어야 기사단이 굴러간다. 그리고 네 능력은 그 어느 영역에서도 최상급이야." 담당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어제 보고서에 따르면, 이도현 님의 응급처치와 물자 정리 능력이 없었다면 부상자 중 최소 셋은 목숨을 잃었을 거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다시 코끝이 찡해졌다. 농담이다. 먼지 얘긴 이제 안 통하니까 그냥 솔직히 말하면, 조금 감동했다. 살면서 이런 식으로 '너 쓸모 있다'는 소리를 정색하고 들어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싶어서. "하지만." 서은하가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전투 상황에서 네 몸을 스스로 지킬 능력이 없다는 건 여전히 큰 문제다. 왕도 기사단은 전방 배치도 있고, 그중에는 마력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임무도 있어." 담당관이 옆에서 조용히 덧붙였다. "실제로 재작년에도 마력이 낮은 견습 기사 한 분이 전방에 배치됐다가... 죄송합니다, 이건 그냥 참고 사항입니다." 굳이 그 뒷말을 안 해줘도 될 것 같은데. 분위기가 더 무거워졌다. "...그럼 저는 왕도에 못 가는 건가요?" 서은하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야 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기사단 정식 소속이 아니라, 우선 견습 신분으로 후방 지원 부대에 배치될 거다. 전투 훈련은 병행하겠지만, 마력이 없는 만큼 그 어떤 전방 임무도 강요받지 않을 거다." 생각보다 배려 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왠지 씁쓸했다. 결국 나는 기사가 아니라 '기사단 살림꾼'으로 시작하는 거잖아. 전생 게임으로 치면 캐릭터 생성할 때 직업 선택 화면에서 '검사', '마법사', '궁수' 다 두고 굳이 '잡화상'을 고른 느낌이랄까. 물론 잡화상도 하다 보면 나름 재밌긴 하다만. 담당관이 수정구를 챙기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참고로, 마력이 없다는 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저희 성 안에도 마력 없이 서기관으로 일하시는 분들 꽤 계세요. 다들 나름 만족하며 지내십니다." 위로인 건 알겠는데 위로가 안 됐다. 엄마가 문밖에서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담당관과의 면담이 끝나고 방을 나서자, 엄마가 나를 꼭 안아줬다. 엄마 품에서는 늘 그렇듯 된장국 냄새 비슷한 게 났다. 이 세계에도 된장이 있는 건 아닐 텐데, 그냥 익숙한 안심의 냄새 같은 거였다. "...도현아." "엄마." "마력 없다는 거, 괜찮아?" "괜찮아요." 사실 완전히 괜찮진 않았다. 전생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나는 결국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뒷바라지하는 사람'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전생에서도 회사에서 화려한 프로젝트는 늘 남 몫이고 나는 뒤에서 서류 정리하고 회식 자리 예약하던 사람이었는데, 여기 와서도 결국 비슷한 포지션이라니. 하지만 어제 최준서를 구했을 때, 부상자들을 눕히고 지혈했을 때 느낀 그 감정만큼은 진짜였다. 그게 검술이든 마력이든 살림 스킬이든, 사람을 지킨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그때 최준서 얼굴에서 핏기가 돌아오던 순간, 그건 확실히 내가 해낸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작은 봇짐 하나를 들고 마을 어귀에 섰다. 봇짐이라고 해봐야 갈아입을 옷 몇 벌에, 엄마가 챙겨준 육포 비슷한 것, 그리고 왠지 모르게 손에 익은 걸레 한 장이 들어있었다. 걸레까지 챙긴 내 자신이 좀 웃겼지만, 이제 와서 뺄 수도 없었다. 엄마가 배웅을 나왔고, 놀랍게도 최준서도 목발을 짚은 채 나와 있었다. "...잘 가라." 최준서가 어색하게 말했다. "왕도 가서도 그 이상한 걸레질 계속할 거야?" "당연하지." "...뭐, 그거 덕분에 살았으니까 할 말은 없다." 최준서가 어깨를 으쓱하며 등을 돌렸다. 저게 최준서 나름의 화해라는 걸, 나는 알 것 같았다.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는 절대 저 성격 안 고칠 거란 것도 왠지 확신할 수 있었다. 서은하가 마차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단정한 갑주 차림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표정이 딱딱해 보였다. "준비됐나?" "네." 마차에 올라타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하안촌을 돌아봤다. 무너졌던 지붕들은 이미 마을 사람들 손으로 절반쯤 복구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사다리 위에서 기와를 얹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 밑에서 뭔가 놀이를 하며 뛰어다녔다. 저 풍경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괴물이 마을을 부수던 아수라장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했다. 마차가 출발했다. 덜컹거리는 길을 따라 왕도 청연성을 향해. [청연경 9장 3절, 손끝의 정성으로 세상을 지키는 자, 그 이름이 결코 작지 아니하리라] 작지 않다는데, 정작 나는 여전히 견습 살림꾼 신분이다. 뭐, 시작이 반이라고 치자. 나머지 반은 왕도 가서 채우면 되는 거고. 하지만 마차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보며, 서은하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마력 없는 자가 그런 힘을 낸다라." 그녀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만약 저 아이의 스킬이 정말 '가정부 계열'이라는 이름 그대로 단순한 것이라면, 왕도의 학자들이 저렇게까지 흥미를 보일 리가 없는데."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마차 덜컹거리는 소리에 묻혀 사라진 그 중얼거림이, 앞으로 내가 마주하게 될 진짜 문제의 시작이라는 것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창밖으로 멀어지는 하안촌을 보며, 나는 속으로 다짐 하나를 했다. 왕도에 가서도 걸레는 놓지 않겠다고.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라면, 어디까지 통할지 한번 보고 싶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