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귀한 몸인데 왜 가정부라니

2화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뭔가 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전생에 자취방에서 배달 음식 시켜놓고 문 앞에 아무것도 없을 때 느끼던, 그 알 수 없는 불길함이랑 비슷한 감각이었다. "도현아, 얼른 나와봐!" 엄마가 마당에서 소리쳤다. 목소리에 다급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뛰쳐나갔다. 마을 우물가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물이 왜 이래?" 한 아주머니가 두레박을 끌어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두레박 안 물이 탁했다. 흙탕물도 아니고, 뭔가 거무튀튀한 색이 섞인 이상한 물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물 표면에 기름 같은 막이 얇게 떠 있었다. 꼭 라면 국물 식혀놓은 것 같은, 그런 텁텁하고 불쾌한 색. 근데 이건 라면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매일 마시는 식수였다. 이거 완전 상수도 오염 사건 아닌가. 그런데 여긴 상수도 관리하는 시청도 없고, 민원 넣을 곳도 없다. "으흠, 이거 심상치 않구먼." 옆에서 지켜보던 아저씨 한 명이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작년에도 이런 일 있었잖어. 그때는 가뭄 때문이었지만서도." "가뭄이랑 이건 다르지 않어? 색깔부터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신전 쪽에서 노인 한 분이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신관인지 뭔지 하는 노인이었는데, 평소엔 근엄하게 경전 읽는 것만 봤지 저렇게 뛰는 건 처음 봤다. [청연경 5장 1절, 땅이 신음하면 그 소리를 듣는 자에게 화가 있으리니] 노인이 이 구절을 읊으며 벌벌 떨었다. 목소리까지 갈라져서 꼭 좀비 영화에 나오는 예언자 같은 포스였다. 분위기 잡는 거 좋은데, 그거 지금 위로가 아니라 협박 아닌가요. 땅이 신음하는 거 들으면 화가 있다니, 그럼 그냥 안 듣는 게 이득 아닌가? 근데 이미 다 들어버렸는데 어쩌지. 나도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젯밤 그 시커먼 하늘 얼룩이 떠올랐다. 분명 뭔가 구름 사이로 시커먼 게 스윽 지나갔었는데, 그때는 그냥 눈이 침침한 건가 하고 넘겼었다. 설마 진짜 뭔가 벌어지려는 건가? "도현아, 저기 좀 봐봐." 엄마가 마을 입구 쪽을 가리켰다. 낯선 사람들이 마을 어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것도 여자 다섯 명이 전부 갑옷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찬 채로. 갑옷은 은빛에 가까운 흰색이었고, 가슴팍에는 청록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햇빛을 받아 갑옷이 번쩍거리는 게, 꼭 명품관 쇼윈도에 진열된 마네킹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귀한 손님이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전생의 습관이 자동으로 발동했다. 손님 접대 매뉴얼이 즉시 재생됐다. 앞치마 두르고, 물 끓이고, 다과상 준비하고. 왜 저들을 '손님'이라고 확신했냐면, 갑옷 든 여자들이 저렇게 떼로 몰려다니는 건 이 촌구석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었으니까. 분명 왕도에서 온 귀족이거나 뭐 그런 사람들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마을 사람들도 낯선 손님을 보고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평소 같으면 호기심에 몰려들 텐데, 갑옷이랑 검을 보니 다들 겁을 먹은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하지, 여기가 왕도도 아니고 무장한 사람 다섯 명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 "저희 집에서 좀 쉬었다 가시겠어요?" 나는 대뜸 앞으로 나서서 말을 걸었다. 주변에서 숨죽인 탄식이 들려왔다. "쟤 미쳤나."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었지만 무시했다. 손님한테는 손님 대접, 그게 내 신조다. 갑옷 입은 여자들 중 가장 앞에 있던, 은발에 눈매가 서늘한 여인이 나를 쳐다봤다. 키가 크고 자세가 꼿꼿한 게, 딱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도 예사롭지 않았다. 자루에 새겨진 문양이 딱 봐도 장인이 하나하나 새긴 티가 났다. "...남자아이가 먼저 말을 거는 건 드문 일이군."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아는가?" "물이 좀 이상해졌어요. 어젯밤엔 하늘도 이상했고요." 내가 말하자 그녀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역시 여기가 맞았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손님 접대가 먼저다. 지금 이 상황 파악하는 것보다 대접 잘 해서 좋은 인상 남기는 게 우선순위 1번. 전생에도 그랬다. 손님 오면 일단 뭐라도 먹여야 마음이 편했다. "일단 안으로 드시죠. 차라도 한 잔 드릴게요." 그녀는 잠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라면." 집으로 안내하는 내내 뒤에서 최준서 무리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쟤 또 오지랖 부린다." "저러다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냐?" "봐라, 저 갑옷들 진짜 기사들일지도 몰라. 잘못 걸리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던데." 큰일은 무슨. 난 그냥 손님 대접 좀 하는 건데. 목이 날아갈 정도로 무례하게 굴 생각도 없고, 그냥 물 끓이고 과일 접시 좀 내놓는 게 다인데 뭐가 문제냐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스킬창을 열었다. [스킬: 접대의 미학 Lv.5] [스킬: 다과 제조 Lv.7] 스킬들이 반짝거리며 활성화됐다. 이럴 때 보면 이 스킬창이 은근히 쓸모가 있다. 전생에 요리라고는 라면 끓이는 게 최고 스펙이었던 내가, 이제는 다과 제조 레벨 7씩이나 찍고 있다니. 인생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순식간에 부엌으로 달려가 물을 끓이고, 아껴뒀던 말린 과일을 꺼내 접시에 담았다. 집에 있는 그릇 중에 그나마 제일 멀쩡한 걸 골라서 정성스레 닦았다. 귀족 아가씨들 앞에 이 빠진 그릇 내놓을 순 없잖은가. 촤르르르륵! 찻잎이 뜨거운 물에 우러나는 소리가 났다.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색깔도 딱 알맞게 우러난 게, 오늘따라 스킬 판정이 후하게 나온 모양이었다. "자, 여기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내려놓자 여인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먹어도 되는 건가?"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당연하죠. 독은 안 탔어요." 농담이었는데 아무도 안 웃었다. 분위기 싸늘해졌다. 아, 이 세계 사람들은 유머 코드가 좀 다른가. 아니면 갑옷 입고 다니는 직업 특성상 농담할 여유가 없는 건가. 어느 쪽이든 민망한 건 나뿐이었다. 은발의 여인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맛있군." 짧은 감탄이었지만 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전생에서 자취방 친구들 불러다 라면 끓여줄 때 이후로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농담이다. 그때는 다들 라면에 뭘 넣었냐고 물어봤을 뿐, 맛있다는 소리는 안 했다. 그래도 이번엔 진짜 칭찬 같았다. 다른 여인들도 찻잔을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빈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한 명은 말린 과일까지 집어먹으며 눈을 반짝였다. "...이것도 맛있는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뿌듯했다. 전생부터 지금까지 통틀어 이렇게 인정받은 게 얼마 만인지.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내가 묻자 그녀가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서은하다." 서은하. 왠지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뭐, 왕도에서 온 귀족 아가씨인가 보다 싶었다. 이름부터가 딱 귀족스러운 게, 우리 마을 이름들이랑은 급이 다른 느낌이었다. 그녀 뒤에 있던 여자 하나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키는 작지만 눈빛이 매서운 여자였다. 갑옷 위로도 어깨가 딱 벌어진 게, 검술 좀 한다는 티가 났다. "단장님, 이런 곳에서 여유 부릴 시간이..." 단장님? 뭔가 쎄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단장이라니, 뭐 그럴 수도 있지. 회사로 치면 팀장쯤 되는 직급 아닌가. 그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지금은 손님 접대에 집중할 시간이다. "저희 마을에 무슨 볼일로 오셨어요?" 내 물음에 서은하가 진지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하안촌 인근에서 이상 마력 반응이 감지됐다. 조사차 왔다." 이상 마력 반응. 순간 어젯밤 그 시커먼 하늘 얼룩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딱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저기, 혹시... 위험한 건가요?" 서은하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직 확실치 않다. 하지만 주의는 필요할 것 같군." 그녀 뒤에 있던 다른 여인 하나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단장님, 이번 것도 지난번 남부 지역이랑 비슷한 패턴이라면..." "말은 나중에." 서은하가 손을 살짝 들어 제지했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뭔가 무게감이 있었다. 지난번 남부 지역이라니. 왠지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뉘앙스인데. 그럼 이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소리 아닌가. 등줄기가 슬쩍 서늘해졌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악!" 나와 서은하 일행 모두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찻잔이 바닥에 떨어졌다. 쨍그랑!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서은하의 부하들이 이미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빠르다. 차 마시다 말고 저렇게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게 신기했다. 역시 프로는 다르구나. 창밖을 내다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우물이 있던 자리에서, 검은 물기둥이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아까 그 탁했던 물이 이제는 아예 시커멓게 변해서,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하늘을 향해 몸을 비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기둥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 하늘 위에 얼룩덜룩한 걸 보고 넘어갔던 어젯밤도 그렇고, 오늘 아침 탁한 우물물도 그렇고, 다 별거 아니라고 애써 넘겼던 것들이 이제 와서 한꺼번에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내 부정을 비웃듯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우물가에 남아있던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검은 물기둥은 이제 우리 집 지붕 높이만큼 치솟아 있었고, 그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꼭 젖은 걸레를 쥐어짜는 소리 같기도 하고, 뭔가 거대한 것이 숨 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서은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차를 마시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전원 전투 준비."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에 부하 넷이 일사불란하게 검을 고쳐 잡았다. 와, 이거 진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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