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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다음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손끝을 확인했다. 아무 느낌도 없었다. 이불 속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펴보고, 손바닥을 이마에 대보고, 심지어 손목 안쪽 혈관까지 눌러봤는데도 그냥 멀쩡한 내 손이었다. 어젯밤 있었던 일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 이상이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김이 빠졌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뭔가 있어야 정상 아닌가. 어제는 분명 손끝에서 뭔가가 훑고 지나갔는데. 그게 하룻밤 자고 났다고 사라지는 게 말이 되나. 감기 몸살처럼 자고 나면 씻겨나가는 그런 건가.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앉아서 한참을 손만 들여다봤다. 손금 사이사이까지 뭐가 있나 찾아보는 내가 좀 우스웠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도련님, 잠시 시간 되십니까." 지훈이었다. 이 집에서 아침부터 저 톤으로 말을 거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뭔데." 문이 열리고 지훈이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종이 상자가 들려 있었다. 낡은 편의점 종이가방에 담겼던 걸 다시 상자에 옮겨 담은 것 같은, 딱 봐도 급하게 포장한 초라한 모양새였다. 테이프 자국이 삐뚤빼뚤했다. "성민 군 부모님께서... 정리하시다가 이걸 발견하셨다고 합니다. 도련님께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상자를 받아들었다. 손이 미리 떨렸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직 상자를 열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 반응이 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다. 마치 몸이 나보다 먼저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낡은 야구모자 하나와, 손으로 쓴 낙서장 몇 페이지, 그리고 병원 이름이 인쇄된 볼펜 하나가 들어 있었다. 볼펜은 흔한 그거였다. 병원 로비에서 아무나 집어다 쓰는, 원가 100원도 안 될 것 같은 그런 볼펜. 야구모자를 보는 순간 목이 메었다. 성민이 항상 쓰고 있던 모자였다. 회색 바탕에 챙 부분만 살짝 색이 다른, 브랜드도 잘 안 보이는 그런 모자. 머리가 다 빠진 뒤로 그 모자를 벗은 적이 없었다. 병실에서도, 화장실 갈 때도, 심지어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모자는 성민의 머리에 있었다. 간호사가 몸 상태를 체크할 때도 성민은 모자만은 벗지 않겠다고 우겼다. 나는 그때 옆에서 웃었다. 대머리가 뭐가 부끄럽냐고. 성민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냥 습관이라고 했다. 습관이라니. 그게 습관이 될 때까지 얼마나 오래 쓰고 다녔다는 건지. "...이거 성민이 그 모자잖아." 나는 중얼거렸다.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모자를 손에 들었다. 챙이 낡아서 살짝 헤진 부분이 있었다. 몇 년 동안 썼는지도 모르겠는 물건이었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생각보다 가벼웠다. 사람 하나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물건인데 이렇게 가벼워도 되는 건가. 안쪽 밴드 부분을 만지는데, 손끝이 뜨거워졌다. 뜨겁다는 감각으로 시작해서, 그게 곧 그 기운으로 바뀌었다. 성민의 손을 잡았을 때 느꼈던, 아라와 손이 스쳤을 때 느꼈던 그 감각. 이번엔 훨씬 강했다. 손끝에서 시작해서 손목을 지나 팔뚝까지 뭔가가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찌릿-!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도련님?" 지훈이 내 표정을 보고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눈앞이 잠깐 하얘졌다. 그 짧은 순간, 뭔가가 보였다. 정확히 형체는 아니었다. 색깔들이 뒤섞이고, 그 사이로 여러 개의 얼굴 같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성민의 웃는 얼굴이 가장 먼저였다. 항상 짓던 그 실없는 웃음. 그다음에는 아라의 얼굴이. 그리고 처음 보는 얼굴들도 몇 개 더. 전부 여자였다. 한 명, 두 명, 세 명... 정확히 몇 명인지 세기도 전에 그 장면들은 겹쳐지고 흩어졌다. ..이게 뭔데. 환시는 3초도 안 되는 사이에 끝났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마치 방금 전 200미터를 전력으로 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련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아냐, 괜찮아." 나는 모자를 다시 상자에 넣으려다가 멈췄다. 안쪽 밴드에 뭔가 쓰여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네임펜으로 쓴 것 같은 작은 글씨였다. 성민의 손글씨였다. 삐뚤빼뚤한 글씨체를 보는 순간 다시 웃음이 나왔다. 이 자식은 글씨도 참 못 썼는데. [도현이 너 이거 보면 진짜야. 웃지 마. 나 진지해.] 그 아래 좀 더 작게, [얀데레 하렘 부탁한다] 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 글씨를 읽고 웃음이 터졌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웃음이 났다. 성민 이 자식은 병실에서 죽어가는 와중에도 이 낙서를 모자 안쪽에 몰래 써놓은 거다. 언제 썼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혹은 링거 갈아주는 시간에 몰래 펜을 꺼내서 썼겠지. 죽기 전에 미리 준비해뒀다는 거잖아. 이 상황에서까지 저 소리를 하고 갔다는 게, 진짜. 웃다가 눈물이 났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나조차 헷갈렸다. 지훈이 옆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손수건을 찾는 게 시야 끝에 보였다. "도련님." 지훈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괜찮아. 진짜 괜찮아." 나는 눈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안 괜찮은데 자꾸 괜찮다고 말하는 습관이 있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누가 걱정해주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일 거다. 아니면 걱정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지훈이 낙서장도 건네줬다. 몇 장 넘겨보니 대부분 학교 필기였는데, 수학 공식 옆에 낙서로 그려진 캐릭터들, 영어 단어 외운 흔적, 그 사이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화살표들. 마지막 페이지 근처에 만화처럼 그린 그림이 몇 개 있었다. 성민이 그린 게 분명한, 못 그린 낙서 그림이었다. 얼굴은 동그라미 두 개에 점 두 개 찍은 수준. 그런데도 각각 다른 머리스타일과 표정으로 구분해놓은 게 보였다. 여러 명의 여자애 얼굴을 대충 그려놓고 그 옆에 화살표로 내 이름을 써놓았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낙서였다. 한 명 옆에는 "이 캐릭터 얀데레각", 다른 한 명 옆에는 "이건 순애보 포지션" 같은 메모까지 붙어 있었다. 무슨 소설 설정표를 짜놓은 것처럼. ..이 자식, 진심이었네. 나는 그 낙서장을 한참 들여다봤다. 성민이 이걸 그리면서 무슨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이 갔다. 분명 히죽거리면서, 나 몰래 이걸 그리고 있었을 거다. 그러다 내가 병실에 들어오면 후다닥 숨기고. 나는 모자를 다시 손에 들고 만졌다. 이번엔 아무 감각도 없었다. 조금 전의 그 뜨거운 느낌이 다시 오길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손끝을 밴드 부분에 몇 번이나 갖다 대봤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게 더 사람 신경을 긁는다. "이 모자, 제가 좀 갖고 있을게." 나는 상자를 닫으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지훈이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참, 도련님. 내일 일정이 하나 잡혔습니다." "무슨 일정." "성진의료재단에서 매년 진행하는 청소년 환우 후원 행사가 있는데, 회장님께서 도련님이 참석하셨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왜." 내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날이 섰다. 지훈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성민 군 이름으로 장학금이 신설됐다고 합니다. 그 발표식에... 유족 대표로 도련님이 서주셨으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성민 이름으로 장학금이라니. 그건 좋은 일 같은데, 왜 하필 지금이지. 왜 하필 내가. 회장님이 이런 걸 왜 이렇게 빨리 결정했을까. 성민이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게 재단 이미지 관리용인가, 아니면 진짜 회장님 마음에서 나온 건가. 나는 그 구분이 잘 안 됐다. 원래 회장님이라는 사람들이 다 그런 거 아닌가. 슬픔도 계산에 넣고, 애도도 일정표에 넣고. ..그런 거 아닌데요, 회장님. 성민이는 계산기로 잴 수 있는 애가 아니었는데요. 물론 이 말은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원래 이런 말을 속으로만 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기자들도 옵니까." "네. 취재진도 상당수 올 것 같습니다." 기자들 앞에 서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손끝이 다시 저릿해졌다. 나는 그 감각을 무시하려고 손을 꽉 쥐었다. 무시하려고 할수록 감각은 더 선명해졌다. 카메라 플래시. 마이크. 질문들. "어떤 심정이십니까." "성민 군과는 어떤 관계셨습니까." 나는 그런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준비된 답변을 지훈이나 회장님 쪽에서 만들어주겠지만, 그걸 내 입으로 말하는 순간 그게 진짜 내 감정처럼 보일까 봐 무서웠다. 아니 정확히는, 진짜 내 감정이 아니게 될까 봐 무서웠다. "도련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냐." 나는 모자를 서랍에 넣으며 대답했다. 손을 서랍 안에서 빼는 순간까지도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서랍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딸깍. 지훈이 방을 나가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서랍 앞에 서 있었다. 저 안에 모자가 있다. 저 모자를 만지면 또 그 뜨거운 감각이 올까, 안 올까. 그게 성민의 뭔가인지, 아니면 그냥 내 신경이 이상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내일이면 그 모자 없이, 이 낯선 힘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사람들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 갑자기 무겁게 다가왔다. 기자들 앞에서, 회장님 앞에서, 그리고 성민의 부모님 앞에서. 유족 대표라는 이름을 달고. 나는 성민의 진짜 가족도 아닌데. 그냥 병실 옆자리를 몇 달 지킨 게 전부인데. 그런데도 회장님은 나를 세우려고 한다. 그게 무슨 심리일까. 성민이 죽기 전에 뭔가 나에 대해서 말해놓은 게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재단 홍보에 내가 쓸모 있어 보이는 걸까. ..잘 지나갈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손을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그냥 평범한 손. 그런데 어제 그 감각과, 오늘 아침 모자를 만졌을 때의 그 뜨거움이 아직도 손끝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착각인지 진짜인지 구분이 안 됐다. 창밖으로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내일이면, 이 모든 걸 안고 사람들 앞에 서야 한다. 나는 그게 무섭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손끝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계속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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