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친구가 남긴 마지막 기적

1화

서울아산병원 12층, 특실 앞 복도. 나는 거기 서서 김민석 교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노려본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됐다. 사람이 화가 나면 눈에 힘이 들어가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누가 그러던데. 근데 그거 아는데, 알아도 안 되는 게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딱 그거였다. 복도는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특실이라고 해서 뭐가 다른가 싶었는데, 사실 다른 건 없었다. 병원은 병원이었다.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찌르고, 형광등이 새하얗게 복도를 밝히고, 그 밑에서 사람들은 다 똑같이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돈을 발라도 안 바뀌는 게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김민석 교수는 서류철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 서류철 안에 뭐가 들었는지 나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냥 그게 성민이의 마지막 기록이라는 것만 짐작했다. "보호자분." 김민석 교수가 낮게 말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다 했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나. 나는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올 뻔했다. 헛웃음이었다. 다 했다는 말을, 마치 시험 답안지 다 채웠다는 투로 말하다니. 근데 그 말투가 딱히 무성의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정중해서 짜증이 났다. "다 했다는 게 뭡니까." 나는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우리 아버지가 성진그룹 회장인데, 국내 최고 의료진 다 불러다 붙였는데. 그게 다 했다는 겁니까?" 말하면서도 스스로 좀 우스웠다. 회장 아들 티를 이렇게 팍팍 내는 게, 열여덟 먹고 할 짓인가 싶었다. 근데 그 순간에는 그거 말고 붙잡을 게 없었다. 아버지 힘, 그거 하나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김민석 교수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침착했다. 화를 내는 나보다 더 어른스러웠다. 그게 더 짜증났다. '..당신도 힘들었겠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은 했다. 근데 입 밖으로는 안 나왔다. 나오면 지는 것 같았다. "교모세포종 4기입니다." 그가 말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치료제가 아직 세상에 없어요."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말을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나는 열여덟 평생,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학교 성적도, 미국 유학 자리도, 강남에서 제일 좋은 헬스장 회원권도, 심지어 여자애들 마음도 - 다 돈으로 됐다. 아버지가 그렇게 키웠고, 나는 그게 세상 이치인 줄 알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과외 선생을 세 명씩 붙였고, 원하는 게 있으면 카드만 내밀면 됐다. 그게 내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규칙이었다. 그런데 성민이는 안 된다고 한다. 윤성민.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 온 첫날, 급식 반찬으로 나온 계란말이를 자기 걸로 나눠준 애. 그 이후로 8년을 붙어 다녔다. 나는 재벌집 아들이고 성민이는 그냥 회사원 아버지를 둔 평범한 집 아들이었는데, 그런 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성민이는 내가 뭘 사줄 때보다 내가 웃긴 소리를 할 때 더 좋아했다.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인연이었다. 반 애들은 다 나한테 뭘 얻어내려고 붙었는데, 성민이는 그런 게 없었다. 오히려 내가 뭘 사주려고 하면 손사래를 쳤다. "야, 그냥 놀아, 뭘 사냐." 그런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이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사주는 게 왜 싫은지.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다. 성민이는 내가 가진 걸 원하는 게 아니라 나를 원했다. 그게 얼마나 귀한 건지, 나는 성민이가 아프기 전까지는 몰랐다. 병실 문을 열었다. 성민이는 침대에 반쯤 기대 앉아 있었다. 머리는 다 빠져서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웃겨서 처음 봤을 땐 진짜로 웃었다. 성민이도 같이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진짜 웃을 일이었나 싶은데,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침대 옆 링거 걸이에는 여러 개의 수액 백이 매달려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약물들이 성민이 몸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걸 쏟아붓는데도 왜 안 되는 건지. "왔냐." 성민이가 말했다. 목소리가 예전보다 작았다. "어. 왔지."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딱딱했다. 얼마나 여기 앉아 있었는지 몸이 저절로 그 딱딱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교수 새끼가 다 했다고 하네." "욕하지 마. 좋은 분이야." 성민이가 웃었다. 웃는데 힘이 없었다. "네가 왜 그 사람 편을 들어." "내 병이니까 내가 알지." 성민이가 눈을 감았다 떴다. "너희 아버지 병원 다 뒤졌잖아. 나 때문에." "당연하지." 말은 그렇게 했는데, 사실 그 며칠 동안 아버지 비서실을 통째로 동원했다. 서울에서 안 된다고 하니 미국 병원 기록까지 뒤졌다. 그렇게 해서 나온 답이, 결국 이거였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는 것. "고마워." 성민이가 말했다. "그리고 미안해." 미안할 게 뭐가 있냐고 물으려는데 목이 막혔다. 이상하게 목이 막혔다. '..네가 왜 미안해. 미안한 건 나야.' 그 말도 속으로만 삼켰다. 입을 열면 목소리가 무너질 것 같았다. "도현아." 성민이가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여름인데 손이 이렇게 차가울 수가 있나. "어." "내가 죽으면." "안 죽어." 나는 말을 잘랐다. "안 죽어, 인마." 말은 그렇게 했는데, 그 순간 내 목소리가 얼마나 떨렸는지 나 자신도 알았다. 확신이 없는 사람이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 그건 그냥 발버둥이었다. "내가 죽으면." 성민이는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했다. "소원 하나 들어줘." 소원. 그 순간 나는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장학재단을 만들어달라는 건가. 아니면 성민이 부모님 노후를 책임져달라는 건가.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성진그룹 외아들이 못하는 게 뭐가 있나. 머릿속으로 벌써 계산이 돌아갔다. 재단 설립, 부모님 아파트, 동생 학비. 어떤 걸 말해도 다 들어줄 준비가 돼 있었다. "뭔데. 말해봐." 성민이가 웃었다. 진짜로, 아까와는 다른 웃음이었다. 힘없는 웃음이 아니라, 뭔가 신난 것 같은 웃음. 아픈 애가 저렇게 웃을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얀데레 하렘." "뭐?"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진짜로. "얀데레 하렘 만들어줘." 성민이가 또박또박 말했다. "나 대신. 살아서 못 해본 거 네가 대신 해줘." 나는 그 말을 세 번 정도 곱씹었다. 이해가 안 됐다. 죽어가는 놈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뭔가 대단한 유언, 감동적인 부탁, 그런 걸 상상했는데. 이건 그런 거랑 완전히 결이 달랐다. "성민아 너 진지하게." 나는 손을 놓칠까봐 꽉 잡았다.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안 놀려. 진심이야." 성민이 눈이 반짝였다. "평생 소원이었어. 근데 나는 이제 못 해. 너는 할 수 있잖아." 웃어야 하는데 웃음이 안 나왔다. 죽어가는 친구가 마지막으로 남긴 소원이 그거라니. 이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나는 둘 다 못했다. 그냥 성민이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상황에서 뭐라고 반응하는 게 맞는 건지, 아무 매뉴얼도 없었다. '..진심이라고 저렇게 눈을 반짝이면서 말하면, 나는 뭘 해야 되는 거야.' 그런 생각만 뱅뱅 돌았다. "약속해." 성민이가 말했다. ".. 약속 안 하면 안 죽을 거야?" 나는 속으로만 그렇게 말했다. 입 밖으로는 못 냈다. 성민이 눈이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장난기와 절박함이 반씩 섞여 있었다. 그게 이상하게 무서웠다. 마치 이게 진짜 마지막 부탁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알았어." 나는 대신 그렇게 말했다. "약속할게." 성민이가 웃었다. 마지막으로 본 웃음이었다. 그날 밤 성민이는 눈을 감았다. 모니터 소리가 뚝 끊기던 그 순간, 나는 손끝에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따뜻한 것도 아니고 차가운 것도 아닌,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뜨윽-. 분명히 느꼈다. 착각이 아니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그 기운은 순식간에 팔을 타고 올라와 가슴 어딘가에서 멈췄다. 마치 뭔가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아니면 뭔가가 나가버린 것 같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냥 이상했다.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게 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냥 친구를 잃은 열여덟 살이었을 뿐이었다. 간호사가 뛰어 들어왔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와서 나를 밀어냈다. "보호자분, 잠시 나가주세요." 누군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났다. 나는 병실 밖으로 밀려났다. 복도에 서서, 나는 방금 손끝을 스친 그 기운이 뭐였는지 생각하려고 했는데, 머리가 그걸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닫힌 병실 문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기계음이 삐이- 하고 길게 울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버렸다. 그냥 다리에 힘이 풀렸다. 복도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누가 지나가면서 나를 쳐다봤는지도 몰랐다.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손끝에는 아직도 그 이상한 감각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마치 뭔가 중요한 일이 방금 일어났다고,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그게 뭔지 몰랐다. 그날 밤은, 그냥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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