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정한 밤의 살인기계

5화

다리가 굳었다. 최광일이 다시 달려드는 걸 알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발바닥이 바닥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과 몸이 따로 놀았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고 하나. 나는 그냥 고장 났다고 부르고 싶었다. 강필호의 눈이 정면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무표정, 그러나 익숙한 무표정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저 눈을 몇 년이나 마주 봤는지, 세어본 적은 없지만 지겹도록 많다는 건 안다. 평가하는 눈. 예전에 훈련실에서, 성과를 확인할 때 짓던 그 눈. 표적이 쓰러졌는지, 탄착점이 정확했는지, 시간 안에 끝냈는지. 딱 그 세 가지만 확인하던 눈빛. 지금도 똑같았다. 아들이 짐승 발톱 아래 깔리기 직전인데, 저 눈은 여전히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피해." 서아의 목소리가 관중석 어디선가 들려왔다. 다급했다. 평소 같으면 저 목소리 하나에 몸이 먼저 반응했을 텐데, 오늘은 그것마저 늦었다.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최광일의 앞발이 옆구리를 찍었다. 퍽. 숨이 통째로 빠져나갔다. 갈비뼈 안쪽에서 뭔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부러졌는지 안 부러졌는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숨을 쉬는 게 급했다. 바닥에 나동그라지면서 시야가 하얘졌다. 천장의 조명이 번져 보였다. 관중들의 함성이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귓가에 축축한 숨소리가 닿았다. 뜨겁고, 비릿했다. 짐승의 숨. 최광일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갈라져 있었다. 사슴이라 생각했다. 아니, 그럴 리가. 저건 사람이었던 무언가였다. "끝났네." 놈이 중얼거렸다. 사람의 발음이 아니었다. 목젖 어딘가에서 억지로 짓눌러 나오는 소리 같았다. 그 순간, 세상이 흔들리며 어둠으로 미끄러졌다. 냄새가 먼저 왔다. 소독약과 쇠 냄새. 낡은 훈련실 바닥, 차가운 타일. 발바닥에 닿는 감촉까지 그대로 되살아났다. 몇 년 전인지도 모를 그 방이, 지금 이 순간과 겹쳐서 떠올랐다. 강필호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재생됐다. "너는 무기야. 무기는 감정이 필요 없어."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세 살 때부터 들었나. 아니면 그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기억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저 말이 박혀 있었다. 총을 쥐여주고, 표적을 가리키고, 결과를 확인하던 손. 그 손은 크고 단단했다. 한 번도 따뜻했던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잘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확인." 짧은 한마디. 그게 다였다. 칭찬도 아니고 위로도 아닌, 그냥 결과 보고서를 읽는 듯한 말투. 표적을 명중시켰을 때도, 훈련 기록을 갈아치웠을 때도 저 두 글자가 전부였다. 확인. 확인. 확인. 어릴 땐 저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아들이 아니라 검증 대상이었다는 걸. 훈련실 벽에 걸린 표적지가 떠올랐다. 총알구멍이 촘촘하게 뚫린 종이 인형. 그 옆에 서서 강필호가 숫자를 세던 목소리. 시간, 명중률, 반응속도. 사람을 재는 방식이 아니었다. 물건을 재는 방식이었다. 그 기억이 모래처럼 흩어지며 다시 현실이 밀려왔다. 최광일의 발톱이 목덜미 근처까지 내려와 있었다. 뜨거운 숨이 뺨에 닿았다. 살갗이 저릿저릿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편할까, 하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가 곧바로 지워졌다. 아직 죽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는. "강도현."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낮고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 사람 목소리 위에 전자음이 얇게 덧씌워진 것 같은 소리였다. 울타리 너머, 관중석 계단 위에서 태준이 내려오고 있었다. 걸음마다 쇳소리가 났다. 다각. 다각. 사이버네틱 외골격이 관절마다 파란빛을 내며 움직였다. 어깨부터 발목까지 감싼 장갑이 관중석 조명을 반사하며 번쩍였다. "형." 목소리가 갈라졌다. 부르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았다. 태준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런데 그 무표정이 강필호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저건 평가하는 눈이 아니었다. 걱정을 억누르는 얼굴이었다. 형은 원래 저런 식으로 표정을 숨기는 사람이었다. 태준이 뭔가를 던졌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물체가 발밑에 떨어졌다. 쿵. 털이 섞인 회색 헬멧, 눈구멍 자리에 붉은 렌즈가 박혀 있었다. 늑대 얼굴 모양. 가까이서 보니 더 이상했다. 인공 털은 진짜 짐승 것 같았고, 렌즈 안쪽에서는 미세하게 뭔가가 회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위이잉.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써." 태준이 말했다. "그거 쓰면 달라져. 네가 뭘 증명하고 싶은지, 그게 대답해줄 거야." "이게 뭔데."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겨우 두 마디를 이어 붙이는 것도 힘들었다. "들개." 짧은 대답이었다. "네 진짜 이름." 들개. 그 말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나지 않도록 막혀 있는 느낌이었다. 최광일이 다시 으르렁거리며 자세를 낮췄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다음 공격은 지금보다 훨씬 셀 거다. 확실했다. 관중석에서 강필호가 여전히 지켜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채로. 확인하듯이. 저 인간은 아들이 물려 죽든 살아나든 딱 두 가지 결과 중 하나로 정리할 것이다. 성공, 아니면 실패. 손이 헬멧을 향해 뻗었다. 손끝이 저려왔다. 마치 정전기에 닿기 직전 같은, 미리 오는 통증이었다. 두근. 씨앗이 다시 뛰었다. 이번엔 더 세게, 더 깊이. 가슴 안쪽 어딘가에서 심장과는 다른 박동이 울렸다. 처음 느꼈을 때는 착각이라고 넘겼는데, 이제는 확실했다. 저건 내 안에 있는 별개의 무언가였다. "쓰지 마." 서아의 목소리가 관중석에서 다급하게 울렸다. "그거 쓰면 못 돌아와." 못 돌아온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최광일의 몸이 이미 움츠러들어 있었다. 다음 도약이 올 거였다. "무슨 뜻이야." 일단 뱉어놓고 봤다. 대답을 들을 여유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돌아온 건 서아의 침묵뿐이었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손끝이 헬멧 표면에 닿았다. 차가웠다. 예상보다 훨씬. 마치 냉동실에서 막 꺼낸 금속 같은 온도였다. 그런데 그 차가움 안쪽에서 뭔가가 미약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심장 박동 같은, 아니면 그보다 더 규칙적인 무언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최광일의 발톱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쐐애액. 바람 소리가 뺨을 스쳤다. 조금만 늦었으면 얼굴이 반쪼가리가 났을 거다. 헬멧을 들어 올렸다. 무게가 생각보다 가벼웠다. 마치 헬멧이 스스로 내 손을 향해 끌려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눈앞이 붉은 렌즈 안으로 가려지기 직전, 강필호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움직이는 걸 봤다. 웃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표정. 그 표정을 어디서 봤더라.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훈련실이었나, 아니면 더 오래된 어딘가였나. 확인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헬멧이 완전히 얼굴을 덮는 순간, 세상의 소리가 전부 지워졌다. 관중의 함성도, 최광일의 그르렁 소리도, 서아의 다급한 목소리도. 전부 한꺼번에 뚝 끊겼다. 마치 누가 세상의 볼륨을 영으로 돌린 것처럼. 귓속에서 낮은 그르렁 소리가 울렸다. 내 목에서 나오는 소린지, 헬멧에서 나오는 소린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목젖이 떨렸다.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손끝의 저림이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까지 번졌다. 뜨거웠다. 뜨겁다 못해 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열기 속에서, 무언가가 눈을 떴다. 내 것이 아닌 무언가가.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