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정한 밤의 살인기계

4화

그르렁 소리가 다시 났다. 낮고 깊은, 배 속에서부터 끌어올린 것 같은 소리였다. 최광일의 몸이 한 번 더 부풀었다. 어깨 근육이 갈라지듯 벌어지고, 등에서 짧은 가시들이 솟아났다. 살가죽이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찌직. 저런 소리를 내면서 사람 몸이 커지는 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니, 어릴 때 봤던 괴물 영화 특수효과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CG는 개나발이고, 저건 그냥 생살이 늘어나는 소리였다.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 사람들 얼굴이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 있었다. 누군가는 손에 든 컵을 흔들었고, 누군가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이 지옥 같은 광경을 앞에 두고 저렇게 신나 할 수 있다니, 인간이란 존재는 참 편리하게 만들어진 것 같다. 나만 빼고. "시작." 곽 회장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울렸다. 감정이라곤 한 톨도 섞이지 않은,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사람 목숨을 걸고 하는 짓을 저렇게 무미건조하게 알릴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소름이었다. 최광일이 튀어나왔다. 순간이었다. 몸을 낮게 숙이고 옆으로 굴렀다. 등 뒤로 뜨거운 바람이 스쳤다. 머리카락 끝이 그 열기에 그슬리는 게 느껴졌다. 놈이 지나간 자리, 바닥이 갈라져 있었다. 콘크리트가 마치 마른 과자처럼 부서져 있었다. "저게 사람이 낸 힘이라고?" 혼잣말이 갈라져 나왔다. 목소리에 물기가 하나도 없었다. 방금 마신 물이 다 어디로 갔는지, 입안이 사막이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두 번째 공격이 왔다. 앞발, 아니 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그것이 얼굴을 향해 뻗어왔다. 손가락 끝에 달린 게 손톱이라기보다는 낫에 가까웠다. 간신히 팔로 막았는데, 뼈가 울리는 충격이 왔다. 으윽. 팔뚝 전체가 저릿하게 마비됐다. 감각이 반쯤 죽었다. 이대로 몇 번 더 맞으면 팔이 아니라 사람이 접힐 것 같았다. 관중석 앞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덩치가 큰 남자, 팔뚝에 금속판이 박혀 있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팔짱을 낀 채로 무표정하게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그 무표정이 오히려 더 위압적이었다.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는 얼굴로 사람이 찢기는 걸 구경한다는 것 자체가. 정철웅. 그 옆에는 붉은 머리의 티플링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뿔이 조명을 받아 매끄럽게 빛났다. 서준. 둘 다 이쪽을 살피고 있었는데, 서준의 시선이 유독 집요했다. 마치 뭔가를 감지하려는 눈빛. 그냥 경기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눈이었다. 저 시선이 뭘 향하고 있는지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럴 여유도 없었고. 최광일이 다시 덤벼왔다. 이번엔 발밑을 노렸다. 발목을 잡아채려는 낮은 궤적. 뛰어올라 피했지만, 착지가 엉망이었다. 발끝이 미끄러졌다. 무릎이 꺾였다. "으윽."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무릎 안쪽에서 뭔가 어긋나는 느낌이 났다. 부러진 건 아닌 것 같은데, 확신은 없었다. 지금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놈의 은빛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쳤다. 동공이 없는, 그냥 은빛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저 눈에 사람이었던 흔적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아니, 남아 있긴 할까. 순간, 명치 아래 그 씨앗이 다시 뛰었다. 두근. 익숙한 박동인데도 매번 처음처럼 낯설었다. 몸속에 심장이 하나 더 있는 기분. 그것도 내 것이 아닌 심장. 손끝에 보랏빛이 스쳤다. 최광일의 몸이 아주 잠깐, 정말 잠깐 굳었다. 걸음이 흐트러졌다. 마치 발밑이 순간적으로 사라진 것처럼, 균형을 잃고 반쯤 기우뚱했다. "뭐야." 놈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인간 언어를 뱉을 수 있다는 게 새삼 낯설었다. 짐승의 목구멍에서 사람 말이 튀어나오는 그 부조화가, 지금까지 봤던 어떤 공격보다 소름 돋았다. 그 틈에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섰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목젖 바로 아래까지 올라온 느낌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서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지금은. 방금 뭐였지. 시선만으로 상대가 멈췄다. 한 번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강필호의 집에서. 기억이 잠깐 스쳤다. 곰팡이 냄새가 나던 좁은 방, 형광등이 깜빡거리던 그 집. 눈을 마주친 순간 상대가 굳어버렸던 그날의 감각이 지금과 똑같이 명치를 훑고 지나갔다. 그 기억이 스치는 순간 관중석 쪽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커졌다. 처음엔 그냥 흥분한 관중들 소리인가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웅성거림의 방향이 이상했다. 경기장이 아니라, 뒤쪽 계단 쪽을 향해 있었다. 사람들이 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렸다.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 정장을 입었는데 오래된 재단처럼 뻣뻣했다. 어깨가 각져 있었고, 걸음이 이상하게 규칙적이었다. 걸음마다 지팡이가 바닥을 찍었다. 딱, 딱.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그 리듬이 이상하게 귀에 박혔다. 마치 시계처럼, 아니면 시한폭탄처럼. 먼저 보인 건 손이었다. 지팡이를 쥔 손, 손등에 오래된 화상 흉터가 있었다. 그다음 어깨, 굽은 목. 마치 오래 짊어진 무게에 눌려 굽어버린 것 같은 그런 자세였다. 마지막으로 얼굴이 조명 아래 드러났다. 숨이 멈췄다. 경기장의 소음이, 최광일의 숨소리가, 관중의 함성이 전부 한 번에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저 얼굴 하나만 남은 것처럼. 강필호였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