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정한 밤의 살인기계

2화

붉은 피부, 뾰족한 귀, 어딘가 익숙한 골격. 박곤을 처음 봤을 때랑 비슷한 인상이었다. 같은 종족인가, 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박곤은 서 있어도 어딘지 구부정하고 어수룩한 느낌이 났는데, 이 남자는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 밀도가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몸집은 박곤보다 확실히 두 배는 컸다. 어깨가 문틀에 닿을 듯했고, 목이 짧아 보일 만큼 상체가 두꺼웠다. 눈빛에서 나오는 압박감이 완전히 달랐다. 박곤의 눈은 어딘가 순진했다. 이 남자의 눈은 계산기 같았다. 나를 위아래로 훑는 그 시선이, 마치 내 몸값을 매기는 것 같아서 등줄기가 서늘했다. 고블린이라도 종류가 다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가 손을 들어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손가락이 굵고 마디가 울퉁불퉁했는데, 그 손이 만지는 건 비단으로 지은 것 같은 재킷이었다. 손목에는 금장 커프스가 걸려 있었다. 저 손끝으로 사람 목뼈를 부러뜨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굳이 저런 장신구를 챙겨 다니는 게 웃겼다. 귀족 흉내를 아주 진지하게 내는 취향이었다. "곽 회장이라고 부르면 된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억양이 이상하게 매끄러웠다. 광고 성우 같은, 연습된 부드러움이었다. 영업용 미소를 지은 채였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여긴 흑야다. 초대받은 손님한텐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초대 안 받았는데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말투가 살아 있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겁먹은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다는 본능 같은 게 작동했다. "받았어. 이태준 이름으로."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명치가 뻐근했다. 마치 그 이름이 내 몸속 어딘가에 낚싯바늘처럼 박혀 있다가, 누가 그걸 살짝 당길 때마다 통증이 오는 것 같았다. 곽 회장이 손짓하자 벽 한쪽이 스르륵 열렸다. 숨겨진 문이었다. 아무 틈도 없어 보였는데 벽 자체가 미닫이문처럼 밀려났다. 이런 장치를 만들어놓을 정도면 여기가 얼마나 오래된 곳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문을 드나들었는지 짐작도 안 갔다. 안쪽은 복도라기보다 통로였다. 좁고 낮고, 벽에는 아무 장식도 없었다. 천장에 박힌 감시 카메라가 붉은 점을 깜빡였다. 하나, 둘, 셋. 세다가 그만뒀다. 너무 많았다. 이 정도면 숨소리 하나까지 데이터로 저장되고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며칠 지내게 될 거다." 곽 회장이 걸으며 말했다. 걸음이 느긋했다. 서두를 필요가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였다. "방은 있지만 나가는 문은 없어. 시합에서 이겨야 나갈 수 있어." "그런 거 동의한 적 없는데요." "동의는 초대장을 받는 순간 이미 한 거야." 그가 웃었다. 웃음소리에 온도가 없었다. 마치 미리 녹음해둔 웃음소리를 재생하는 것 같았다. *** 방은 좁았다. 침대 하나, 철제 세면대, 그리고 벽에 박힌 스피커. 스피커가 지금도 뭔가를 감지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숨소리까지 듣고 있을 것 같았다. 세면대 위에 작은 거울이 붙어 있었다. 거기 비친 내 얼굴을 잠깐 들여다봤다. 며칠 사이 눈 밑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원래도 잘생긴 편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냥 좀비 영화 오디션 봐도 붙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런 순간에도 실없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는 확실히 스트레스를 유머로 버티는 타입인 것 같다. 등을 대고 누워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다시 깜빡거렸다. 파직. 이 건물은 전기 배선을 대체 어디서 끌어다 쓰는지, 방마다 이런 조명을 달아놓은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놓은 걸지도 모른다. 사람을 계속 불안하게 만드는 장치로. "증명해라, 라니."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형이 보낸 메시지 속 그 짧은 문장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됐다. 뭘 증명하라는 건지, 누구한테 증명하라는 건지, 형은 늘 절반만 말했다. 마치 내가 나머지 절반을 스스로 채워 넣어야 자격이 생기는 것처럼. 늘 그랬다. 어릴 때부터 태준은 무언가를 던져놓고 사라졌다. 답은 알려주지 않고, 문제만 남겨두는 사람. 그게 형의 방식이었다. 문제는 이번엔 그 문제가 목숨이 걸린 종류라는 거였다. 천장을 바라보는 채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 붉은 얼룩 같은 게 계속 어른거렸다. 카메라의 점멸등이 시야에 남아 있는 잔상인지, 아니면 그냥 피로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 복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목소리였다. 발소리가 먼저 들리고, 그다음에 목소리가 따라왔다. "거기 새로 온 애 맞지." 문이 벌컥 열렸다. 노크도 없이. 예의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등장이었다. 검은 스텔스 수트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피부는 옅은 회색, 이마에 짧은 뿔이 두 개. 티플링이었다. 허리에 이중 단검 두 자루가 교차로 걸려 있었는데, 그 손잡이가 얼마나 많이 손에 익었는지 광택이 다 닳아 있었다. "윤서아." 그녀가 짧게 자기 이름을 말했다. 인사치레가 없었다. 이름 하나로 자기소개가 끝이라는 듯. "강필호 밑에서 일한 적 있어. 너, 도현이지." 순간 몸이 뻣뻣해졌다. 그 이름이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다. 강필호는 태준 형과 얽힌 사람 중에서도 이름만 들어도 골치가 아파지는 쪽이었다. "어떻게 알아요." "소문이 났으니까. 그 집안 아들이 흑야에 초대받았다고." 이 세계에서는 소문이 참 빠르구나. SNS도 없을 텐데, 이런 지하 세계일수록 정보가 더 빨리 도는 모양이었다. 서아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표면적으로 무심했지만 눈은 계속 나를 훑고 있었다.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마치 내 팔다리 길이며 체중이며, 시합에서 얼마나 버틸지 가늠하는 것처럼. "강필호 밑에서 일했다는 거,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 지금은 아니고." 더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손을 저었다. 말 끊는 방식이 딱 한 번뿐이었는데도 다시 물어볼 틈을 안 줬다. "나중에. 지금은 규칙부터 알아둬. 여기서 살아남는 법." 살아남는 법이라는 말이 이렇게 일상적인 톤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게 새삼 무서웠다. "첫째, 카메라는 사각이 없어. 몰래 뭘 하려는 생각은 접어." "둘째, 곽 회장한테 거짓말하지 마. 표정만 보고 알아채." "셋째" 서아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정지 시간이 이상하게 길었다. 마치 이 말을 해도 되는지 스스로 재는 것처럼. "태준 오빠 메시지를 너무 믿지 마." 심장이 삐끗했다. "왜요." "그 사람, 다정한 척하면서 계산 다 끝내놓고 움직여. 여기 초대장 보낸 것도 그렇고." "형이 왜 나를 여기로." "몰라. 근데 걔가 아무 이유 없이 뭘 하는 거 봤어?" 대답할 말이 없었다. 태준은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다만 그 이유를 나한테 말해준 적은 거의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어릴 때 집을 나갈 때도, 몇 년 만에 다시 연락이 왔을 때도, 늘 형은 자기 페이스대로 정보를 흘렸다. 나는 그저 그 조각들을 주워 모아 뭔가를 짐작하는 역할이었다. "서아 씨는 그럼 왜 여기 있어요." "나? 나야 빚이지." 그녀가 피식 웃었다. 웃음이 서늘했다. "여기 있는 애들 대부분 빚 때문에 있어. 아니면 팔려 왔거나. 너처럼 초대장 받고 온 케이스는 드물어." 드물다는 말이 좋은 뜻으로 들리지 않았다. 서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관절 꺾이는 소리가 났다. 오래 앉아 있던 사람의 몸 같지 않게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쉬어. 내일부터 시작이니까." "시작이 뭔데요." 문 앞에서 그녀가 돌아봤다.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격투." 그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질 때까지, 나는 문틀만 쳐다보고 있었다. *** 그날 밤 늦게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진동. 침대 위에 놓아둔 휴대폰이 짧게 떨렸다. 화면이 켜지는 순간 방 안이 잠깐 파랗게 물들었다.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해 있었다. [네가 여기 있는 이유, 나중에 설명해줄게. 지금은 그냥 살아 있어.] 지금은 그냥 살아 있어. 그 말이 위로처럼 들리다가, 곱씹을수록 경고처럼 들렸다. 처음 읽었을 때는 형이 나를 걱정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읽었을 때는, 마치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살아 있는지 아닌지가 형에게는 확인이 필요한 사항일 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형은 뭘 알고 있는 걸까. 아니, 형이 나를 여기로 부른 게 아니라면. 누가. 이 물음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서아의 말이 자꾸 그 위에 겹쳐졌다. 걔가 아무 이유 없이 뭘 하는 거 봤어? 없었다. 태준은 늘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천장 스피커에서 낮은 잡음이 들렸다. 치이익. 마치 누군가 이 방의 대화를 다시 재생해 듣는 것 같은 소리였다. 서아가 했던 말, 내가 중얼거린 혼잣말, 형의 메시지를 소리 내어 읽었던 그 순간까지, 전부 다시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휴대폰을 끌어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형광등이 다시 한 번 깜빡였다. 파직. 내일부터 시작이라던 서아의 말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격투. 그 단어 하나가 방 안의 어둠보다 더 무겁게 가슴 위에 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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