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밤이 되자 박성구는 창고 문을 열었다.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좁은 공간에 크게 울렸다. 손전등 불빛이 도윤의 얼굴을 비췄다. 도윤은 눈을 찌푸렸다. 하루 종일 어둠 속에 있었던 눈이 갑작스러운 빛에 반응했다.
"나와."
낮은 명령이었다. 도윤은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떨렸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물도 마시지 못했다.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박성구는 손전등을 도윤의 발 쪽으로 내렸다. 그늘 속에서 남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에도 별다른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짐을 옮기라고 지시하는 투였다.
박성구는 도윤의 팔을 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도윤은 그 힘을 거스르지 않았다. 거스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당을 지나 대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 발끝이 자갈에 걸려 몇 번 휘청였다.
박은주는 따라오지 않았다. 창문 안쪽에서 커튼 사이로 지켜보고 있었다. 도윤은 그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돌아본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골목을 몇 개 지났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불빛과 그림자가 번갈아 도윤의 얼굴을 지나갔다. 도윤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마다 박성구의 옆얼굴이 잠깐씩 드러났다. 무표정했다. 그 무표정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화를 내는 사람보다 아무 표정이 없는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박성구는 공원 입구에서 멈췄다.
"여기 있어."
"왜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에서 나왔다. 오랜 습관이었다.
"묻지 말고."
박성구는 도윤의 팔을 놓았다. 손아귀의 압박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 자리에 남은 통증이 느껴졌다. 붉은 손자국이 팔뚝에 남았을 것이다.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박성구는 뒤돌아 걸어갔다. 도윤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발소리가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혼자였다.
공원은 낮과 다른 곳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졌다. 벌레 소리가 낮게 울렸다. 멀리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도윤은 벤치에 앉았다. 나무 표면이 차가웠다. 몸이 떨렸다. 추운 건지 무서운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배 속이 텅 비어 울렸다. 허기와 두려움이 뒤섞이면 어떤 느낌이 나는지, 도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익숙하다는 것이 서글펐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손목에 시계가 없었다. 낮에 봤던 숲 쪽을 바라보았다. 나무들이 검은 덩어리처럼 뭉쳐 있었다.
타는 냄새.
다시 느껴졌다. 이번엔 훨씬 진했다. 나무가 타는 냄새와는 조금 달랐다. 무언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쇠 냄새 같기도 했고, 젖은 흙냄새 같기도 했다. 낮에 맡았던 것과 분명 같은 냄새였다.
도윤은 일어섰다. 다리가 이끄는 대로 숲 쪽으로 걸어갔다. 생각이 먼저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몸이 먼저 방향을 잡았다. 낙엽 더미가 있던 자리로 다가갔다.
발밑에서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바스락. 바스락. 그 소리 사이로 다른 소리가 섞여 들렸다. 숨소리 같았다.
무언가 있었다.
작은 짐승이었다. 낮에 사내가 놓고 간 그것이었다. 몸이 조금 커져 있었다. 지금은 중형 개만 한 크기였다. 등에 짧은 털이 덮여 있었고, 눈은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났다. 노란색이었다.
짐승과 도윤의 눈이 마주쳤다.
도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짐승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 존재 사이의 거리가 멈춰 섰다. 벌레 소리마저 잠시 잦아드는 듯했다.
그때, 짐승의 몸에서 낮은 울림이 흘러나왔다.
웅—
도윤의 가슴속에서도 같은 울림이 대답하듯 울렸다. 손끝이 뜨거워졌다. 오늘 낮 지붕으로 옮겨졌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감각이었다. 낯선데도 낯설지 않았다.
"너..."
도윤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몰랐다. 짐승에게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보다 먼저 입이 움직였다.
짐승이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도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도윤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짐승의 코끝이 도윤의 손등에 닿았다. 따뜻했다. 예상 밖의 온기였다. 짐승이라면 차가울 거라고 생각했다. 파충류나 곤충 같은 것들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하지만 손등에 닿은 감촉은 사람의 체온과 비슷했다.
"나 알아?"
짐승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도윤의 손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마치 인사하듯이. 도윤은 그 동작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도윤은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짐승의 등을 만졌다. 털은 부드러웠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 그리고 그 아래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느껴졌다. 가시 같았다. 아주 짧고 촘촘한 가시. 눌러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신기한 감촉이었다.
짐승이 몸을 조금 낮추자, 몸 색이 서서히 변했다. 회색에서 보라색으로. 그리고 다시 회색으로. 마치 물속에서 잉크가 퍼졌다가 다시 걷히는 것 같았다.
도윤은 숨을 멈췄다.
"뭐야, 너."
짐승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윤은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이 짐승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확신. 처음 보는데도 낯설지 않다는 감각. 마치 오래전에 헤어졌던 것과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없는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마주 앉아 있었다. 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만 오갔다. 나뭇잎이 서로 부딫히는 소리가 이따금 섞였다. 도윤은 그 소리들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창고 안의 정적과는 다른 정적이었다.
"난 도윤이야."
도윤이 먼저 말했다. 이름을 말하는 게 이렇게 어색한 일인지 몰랐다. 누군가에게 자기 이름을 말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짐승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고는 도윤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무게가 실렸다. 살아 있는 무언가의 무게였다.
따뜻함이 도윤의 몸 전체로 번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정확히 언제 이런 온기를 느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 누군가의 품에 안겼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도윤은 짐승의 등에 손을 얹고 가만히 있었다. 눈물이 갑자기 차올랐다. 왜 눈물이 나는지 몰랐다. 서럽지도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눈물이 흘렀다. 도윤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짐승은 움직이지 않고 도윤의 무릎에 그대로 있었다.
그때,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짐승도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노란 눈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했다. 귀 같은 부위가 쫑긋 섰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두 명의 발소리였다.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무언가를 찾는 듯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낮은 목소리였다. 도윤이 모르는 목소리였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짐승이 몸을 낮췄다. 몸이 순식간에 작아지기 시작했다. 개만 하던 크기가 새끼 고양이만 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도윤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도윤은 놀라 몸을 굽혔지만 짐승을 밀어내지 않았다. 옷깃 사이로 들어온 몸이 작게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숲 사이로 손전등 불빛이 비쳤다. 나뭇가지 사이로 빛이 흔들리며 다가왔다. 두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정장을 입은 여자였다. 다른 한 사람은 코트를 걸친 남자였다.
도윤은 낮에 대문 앞에서 스쳐 지나가듯 봤던 얼굴들이라는 걸 알아챘다. 학교에서 왔다던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유심히 보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확실히 기억이 났다.
"도윤이니."
여자가 물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오히려 경계심이 들었다.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옷 속에서 짐승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자신의 심장과 비슷한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 박동이 도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심하라고, 아니면 괜찮다고.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난 민서현이야. 학교 선생님이고."
민서현이 천천히 다가왔다.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겁먹은 동물을 다루는 사람처럼. 도윤은 뒤로 물러났다. 벤치 등받이에 등이 닿았다.
"괜찮아. 해치지 않아."
"뭘 원해요."
도윤이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목이 말라서인지, 긴장해서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민서현과 고태은이 서로를 잠깐 바라보았다. 눈짓을 주고받는 그 짧은 순간에 도윤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합의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미 무언가를 알고 온 사람들이었다.
"네가 안전한지 확인하고 싶어서."
"안전해요."
말은 그렇게 나왔지만 확신은 없었다. 도윤 자신도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창고에 갇혀 있었잖니."
도윤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아는지 몰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박성구와 박은주와 어떤 관계인지, 왜 그런 것을 알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때, 옷 속에서 짐승이 작게 몸을 뒤척였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민서현의 시선이 도윤의 가슴 쪽으로 향했다. 그 시선이 정확했다. 우연이 아니었다.
"거기..."
민서현이 말을 멈췄다. 무언가를 감지한 표정이었다. 코끝을 살짝 찡그린 것 같기도 했다. 마치 낯선 냄새를 맡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도윤은 짐승을 감싸듯 두 팔로 옷을 눌렀다.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이 짐승을 이 사람들에게 보이면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몸이 그렇게 반응했다.
"아무것도 없어요."
거짓말이었다. 목소리가 흔들렸다. 스스로도 그 거짓말이 얼마나 어설픈지 알았다. 하지만 도윤은 이 짐승을 지켜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그래야 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일 같았다.
민서현의 손목에서 팔찌가 옅게 빛났다. 처음엔 희미했지만 점점 선명해졌다. 고태은이 그 팔찌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표정에 긴장이 스쳤다.
점. 선. 물결. 탑.
문양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옆에 새로운 문양이 하나 더 나타났다.
도윤이 본 적 없는, 짐승의 형상을 닮은 문양이었다.
민서현의 눈이 그 문양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도윤을 향했다. 그 시선에는 방금 전까지 없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놀람인지, 확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도윤은 읽어낼 수 없었다.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벌레 소리가 다시 낮게 이어졌다. 세 사람과, 도윤의 품속에 숨은 하나의 존재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민서현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