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8살, 해태의 주인이 되다

2화

도윤이 마당에 들어선 것은 저녁 여섯 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하늘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다. 서쪽 끝에 남은 붉은 기운이 담장 위로 걸쳐 있었다. 도윤은 가방을 어깨에 멘 채 대문을 밀었다.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늘 나던 소리였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도윤은 박태윤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태윤은 마당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흐느낌은 크지 않았지만 규칙적이었다.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구겨진 시험지였다. 종이 가장자리가 접히고 다시 펴진 자국이 여러 번 나 있었다. 붉은 색으로 크게 쓰인 숫자가 보였다. 낙제점이었다. 박성구가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마에 핏줄이 서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지만, 도윤은 그 빈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도윤아." 부르는 목소리부터 이상했다. 낮고 느린,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도윤은 걸음을 멈췄다.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태윤이 시험지를 왜 네가 손댔어." 도윤은 무슨 말인지 몰랐다. 태윤의 시험지에 손댄 적이 없었다. 오늘 하루 태윤과 마주친 적조차 몇 번 없었다. 아침에 밥을 먹을 때, 그리고 학교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 그게 전부였다. "안 그랬어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도윤은 자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나올 줄 몰랐다. "안 그랬다고?" 박성구가 다가왔다. 걸음마다 마당의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도윤의 귀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걸음 하나, 자갈 소리 하나. 걸음 둘, 자갈 소리 둘.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도윤은 뒤로 물러났다. 발뒤꿈치가 담장 벽에 닿았다. "쟤가요. 쟤가 그랬어요." 태윤이 손가락으로 도윤을 가리켰다. 눈물이 그친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져 있었다. 그 웃음은 아주 짧게 스쳤다가 곧 사라졌다. 박성구가 보지 못한 순간이었다. 도윤은 그 웃음을 알았다. 여러 번 본 웃음이었다. 학교에서, 집에서, 밥상에서. 태윤이 무언가를 저질러 놓고 도윤에게 뒤집어씌울 때마다 지어 보이던 그 웃음이었다. 박성구의 손이 올라갔다. 도윤은 몸을 움츠렸다. 손등에 통증이 번졌다. 뺨이 아니라 팔이었다. 그다음은 등이었다. 세 번째는 옆구리였다. 숨이 턱 막혔다. 도윤은 숨을 쉬려고 입을 벌렸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을 해?" 박성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손이 다시 올라왔다. 도윤은 바닥에 쓰러졌다. 무릎이 자갈에 긁혔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자갈 모서리가 살을 파고들었다. 손바닥에서 미세한 통증이 번졌다. 시야가 흔들렸다. 마당 흙바닥의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오래된 흙과 마른 풀 냄새였다. 박은주가 현관에서 나왔다. 팔짱을 낀 채였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문지방에 걸쳐 있었다. 말리지 않았다. 그저 지켜보았다.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마치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걔 애초에 안 데려왔으면..." 박은주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윤은 그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언제나 같은 말이었다. 몇 번을 들어도 그 말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매번 처음 듣는 것처럼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박성구가 다시 손을 들었다. 도윤은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이 무엇일지 알고 있었다. 몸이 먼저 그것을 알았다. 어깨가 굳고, 목이 움츠러들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감각이었다. 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그 뜨거움은 낯설었다. 익숙한 두려움의 냉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마치 몸속 어딘가에 눌러놓았던 뚜껑이 갑자기 열린 것 같았다. 눈앞이 하얘졌다. 웅— 낮은 울림이 몸속에서 터졌다. 도윤은 다음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마당이 아니었다. 지붕 위였다. 도윤은 자신의 집 지붕 기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숨이 가빴다. 손이 떨렸다. 무릎에서 자갈에 긁힌 상처가 화끈거렸다. 발밑으로 기와의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저녁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아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갔어!" 박성구의 목소리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발소리가 마당을 이리저리 오갔다. 창고 쪽으로, 담장 쪽으로, 대문 쪽으로. "성구야, 저기!" 박은주가 지붕을 가리켰다. 도윤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 사람이 모두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목이 꺾일 듯 젖혀진 자세였다. 태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방금까지 웃던 얼굴이 아니었다. 박성구가 소리쳤다. "내려와, 당장!"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몰랐다. 손끝이 여전히 차가웠다. 배 속의 뜨거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흔적만 남기고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저게 뭐야." 박성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화보다 더 짙은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도윤은 그 목소리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낮음이었다. 박은주가 남편의 팔을 잡았다. "당신, 저거..." 말을 잇지 못했다. 손가락이 도윤을 가리킨 채로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도윤은 지붕 위에서 두 사람의 표정을 보았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두려움이었다. 박성구는 늘 도윤을 내려다보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로, 손으로, 눈빛으로. 그런데 지금은 도윤을 올려다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 삼킨 사람의 얼굴이었다. "내려와." 다시 소리쳤다. 이번엔 목소리가 흔들렸다. 명령이라기보다는 애원에 가까운 소리였다. 도윤은 어떻게 내려가야 할지 몰랐다. 방금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몸이 스스로 움직인 것 같았다. 아니, 몸이 아니라 무언가가 자신을 옮긴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도윤을 손으로 집어 다른 곳에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지붕 끝으로 다가갔다. 기와가 발밑에서 흔들렸다. 하나가 살짝 미끄러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딱, 하는 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없었다. 처음 올라온 사람이 있었다면 어떻게 올라왔는지 알았을 텐데, 도윤은 그저 그 자리에 나타났을 뿐이었다. 지붕 위에서 내려다본 마당은 낯설게 보였다. 늘 걸어 다니던 곳이었는데, 위에서 보니 전혀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창고의 낡은 지붕, 화단의 마른 나뭇가지, 대문 옆에 쌓인 신문 뭉치. 익숙한 것들이 낯선 각도로 놓여 있었다. 박성구가 마당을 가로질러 창고 쪽으로 갔다. 잠시 후 낡은 사다리를 끌고 나왔다. 사다리 다리 하나가 짧아서 걸을 때마다 삐걱거렸다. "거기 가만있어." 도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다리가 지붕에 걸쳐졌다. 나무 사다리가 기와에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박성구가 올라오려다 멈췄다. 손이 사다리 옆면을 붙잡은 채로 굳어 있었다. "너, 뭘 한 거야."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말해봐." 박성구의 목소리에 이번엔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도윤은 그것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박성구가 자신에게 조심스러워하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도윤을 향해 던져진 말들은 대부분 명령이거나 질책이었다. 조심스러운 말투는 처음이었다. 낯설었다. 그 낯섦이 도윤의 가슴 안쪽 어딘가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도윤은 스스로 사다리 쪽으로 다가갔다. 발을 딛는 순간, 다시 그 뜨거운 감각이 배 속에서 솟았다. 이번엔 참으려 애썼다. 이가 딱딱 부딪혔다. 손끝으로 사다리 옆면을 붙잡았다. 나무의 거친 결이 손바닥에 닿았다. 간신히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한 칸, 한 칸, 발을 옮길 때마다 사다리가 흔들렸다. 마당에 발을 딛는 순간, 박성구가 도윤의 팔을 잡았다. 손이 아플 정도로 세게 조였다. 손가락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너, 뭐야." 도윤은 팔을 빼려 했다. 박성구의 손이 더 세게 조여졌다. 팔뚝에 손가락 모양의 붉은 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이거 마법이야?" 박은주가 다가와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눈은 도윤의 얼굴이 아니라 몸 전체를 훑어보고 있었다. 마치 낯선 물건을 감정하는 눈빛이었다. 태윤은 뒤로 한참 물러나 있었다. 눈을 크게 뜬 채로. 발은 현관 쪽을 향해 반쯤 돌아가 있었다.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는 자세였다. 마법이라는 말이 도윤의 귀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말이었다. 학교 도서관 책 어딘가에서. 그림책이나 오래된 전설 속에서나 나오던 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건지 몰랐었다.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뭘 알아요." 도윤이 낮게 대답했다. 목이 아팠다. 침을 삼키는 것도 힘들었다. 박성구가 도윤을 밀쳐 창고 쪽으로 끌고 갔다. 발이 자갈에 걸려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창고 문 앞에 이르자 박성구가 문을 거칠게 열었다. 안에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흘러나왔다. "오늘부터 거기서 나오지 마." 창고문이 닫혔다. 밖에서 걸쇠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철컥, 하는 짧은 소리였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어두운 안에서 도윤은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심장이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등에 닿은 벽은 차가웠다. 낮 동안 데워졌던 온기가 이미 다 빠져나간 듯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손의 윤곽만 겨우 보였다. 손끝이 아직 조금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자신 안에 있었다. 지붕 위로 순식간에 옮겨진 감각. 뜨거움과 울림.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학교에서 배운 어떤 과목에도, 어떤 책에도 그런 것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창고 밖에서 박성구와 박은주의 낮은 대화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낮추려 애쓴 것 같았지만 창고의 나무판 사이로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저거 팔 수 있는 건가." 박성구의 목소리였다. 도윤은 그 말을 듣고도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팔다니. 무엇을 판다는 것인지. "팔다니, 어디에." 박은주의 목소리는 흥미가 섞여 있었다. "몰라. 무슨 방법이 있겠지." 도윤은 벽에 몸을 더 붙였다. 무릎을 끌어당겨 가슴 앞에 모았다. 밖의 대화가 끊겼다. 잠시 발소리가 마당 쪽으로 멀어졌다. 창고 안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창문 하나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낡은 농기구와 상자들 사이로 도윤이 앉을 자리만 겨우 남아 있었다. 손끝으로 바닥을 짚어보니 흙바닥에 깔린 나무판이 삐걱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창고 문틈으로 낯선 냄새가 스며들었다. 타는 냄새. 낮에 공원 숲에서 맡았던 그 냄새였다. 옅게, 가죽 태우는 듯한 냄새가 창고 안에 번졌다. 처음엔 아주 희미했다. 그러나 곧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 도윤은 숨을 멈췄다.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이 냄새는 낮에도 맡았다. 공원 숲의 그늘 아래에서, 아무도 없는 것 같았던 그 자리에서. 그때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 다시 나타난 이 냄새는 우연일 수 없었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어둠 속의 냄새는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도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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