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 피아노가 여자라니

4화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도윤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불을 덮었다가 걷어찼다가, 몸을 뒤척이며 몇 번이고 천장을 노려봤다. 방 한쪽에 서 있던 피아노가 자꾸만 눈에 걸렸다. 그 안에서 사람이 나온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눈을 감으면 자꾸 어젯밤 일이 꿈처럼 흩어졌다. 소율은 새벽까지 인간의 모습으로 방을 어슬렁거렸다.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도윤의 책상 위 물건들을 하나씩 만져보기도 했다. "이건 뭐야?" "핸드폰이요." "이건?" "충전기." 몇 번이나 그런 문답이 오갔다. 도윤은 대답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 '저 여자는... 진짜 사람인가, 아닌가.' 그러다 동이 트기 직전, 소율은 다시 피아노로 돌아가 있었다. 지금은 평범한 낡은 업라이트처럼, 방 한가운데 조용히 서 있었다. '혹시 꿈이었을까.' 도윤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머리가 무겁고 눈두덩이 뻐근했다. 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탓이었다. 그는 잠시 이불 속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몸을 일으켜 피아노 쪽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다시 뭔가가 튀어나올까 봐,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도윤이 조심스레 다가가 뚜껑을 열었다. 건반은 여전했다. 오래된 나무 냄새, 익숙한 상아색 건반. '그냥 낡은 업라이트일 뿐이잖아.' 도윤은 손끝으로 건반의 표면을 슬쩍 문질러봤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갈라짐, 색이 바랜 자국. 어제 봤던 그 기이한 빛의 흔적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 정말 꿈이었나.' 안도감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건반 하나를 눌렀다. 낮은 도 음이 울렸다. "음이 마음에 들어?" 귓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도윤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으악!"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리가 얼얼했다. 그보다 심장이 더 얼얼했다. 소율이 어느새 피아노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젯밤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자세로. "아직도 못 믿어?" 소율이 재밌다는 듯 눈을 접었다. "이, 이게 대체..." 도윤이 숨을 몰아쉬며 벽을 붙잡고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보여줄까? 한 번 더?" "아, 아니요, 그럴 필요 없—"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소율의 몸이 다시 빛으로 흩어졌다. 순식간에 피아노의 형태가 되었다. 도윤이 놀랄 틈도 없이, 곧바로 인간형으로 돌아왔다. "봤지? 이제 믿어?" "자, 잠깐만요, 저 진짜 못 믿겠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왜 그렇게 소리 질렀어?" 소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세 번, 네 번. 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빛이 흩어지고, 나무판이 겹겹이 쌓이고, 다시 그 형태가 무너지며 사람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 과정을 눈앞에서 반복해서 보고 있자니, 도윤은 어느 순간부터 무섬증보다 어지러움이 앞섰다. "그, 그만, 제발 그만해요." "됐어요, 됐다고요!" 도윤이 결국 손을 저으며 소리쳤다. "인정하는 거지?" 소율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턱을 살짝 든 채,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인정... 할게요." 도윤은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밤을 새운 데다 이 상황까지 겹쳐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근데 왜 지금? 15년이나 지나서 왜 갑자기..." 도윤은 눈을 들어 소율을 똑바로 바라봤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째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왜 하필 이 낡은 피아노인지, 그리고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건지. 소율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는 것을, 도윤은 놓치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말끝을 흐렸다. 도윤이 뭔가 더 물으려 했지만, 소율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배고파." "네?" "밥 먹으러 가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저는 지금—" 소율이 도윤의 팔을 잡아끌었다. 손끝이 생각보다 따뜻했다. "잠깐만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중요해. 15년 동안 못 먹었으니까." 소율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눈빛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을 말하는 사람처럼. 도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여자, 아니 이 피아노는... 대체 뭘 원하는 거지?' 물어야 할 게 산더미인데, 정작 앞에 있는 이 존재는 밥부터 먹자고 팔을 당기고 있었다. 결국 도윤은 옷을 갈아입었다. 허둥지둥 셔츠를 걸치고 바지를 갈아입는 내내, 소율은 방 한가운데 서서 그 모습을 빤히 구경했다. "뭘 그렇게 봐요?" "신기해서." "저, 저기 좀 안 보고 있을래요?" 소율은 대답 대신 그저 웃었다. 소율도 어딘가에서 신발을 구해 신었다. 어디서 나타난 신발인지 물어볼 여유도 없었다. 도윤은 그저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넘겼다. '묻는다고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고.' 둘은 원룸을 나섰다. 좁은 골목을 지나며 소율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담벼락에 붙은 낡은 전단지, 지나가는 오토바이, 골목 끝에 앉아 있는 고양이까지 하나하나 눈에 담는 듯한 얼굴이었다. "바깥은 오랜만이네."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 아니에요?" "몸으로는 처음이지만, 창밖으로는 15년 봤어." 도윤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 '창밖으로... 15년을 지켜봤다는 거야?'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말인즉슨, 이 방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소율이 지켜봤다는 뜻이었다. 도윤 혼자 방에서 했던 온갖 시시콜콜한 행동들까지도. '설마 다 봤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질문이었다. 카페 근처에 다다르자 소율이 도윤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저기, 저 가게 괜찮아 보이는데." 작은 카페였다. 나무 간판이 걸려 있고, 유리창 너머로 원목 테이블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창가에 사람들이 몇 명 앉아 있었다. "저기 들어가면 조용히 있을 수 있어요?" 도윤이 걱정스레 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할까 봐 벌써부터 가슴이 조여왔다. "당연하지." 소율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턱을 슬쩍 들며, 그 어떤 걱정도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이 얼마나 위험한 신호였는지, 도윤은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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