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무대 위 조명이 두 사람을 비췄다.
새하얀 빛줄기가 검은 그랜드 피아노 위로 떨어졌다.
그 옆에,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나란히 섰다.
드레스 자락이 조명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준비됐어?"
여자가 낮게 물었다.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당연하지."
강도윤이 짧게 대답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관객석에서 함성이 터졌다.
수천 개의 눈동자가 두 사람에게 쏠렸다.
두 사람의 손이 스치듯 맞닿았다.
그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리고, 암전.
모든 것이 검게 물들었다.
다시, 현재.
콩쿠르 대기실 안은 소음으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손가락을 푸는 소리, 낮은 대화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가 뒤섞였다.
도윤은 구석 의자에 앉아 손가락을 풀고 있었다.
관절 하나하나를 천천히 꺾으며, 무릎 위에 올려둔 악보를 눈으로만 훑었다.
"강도윤 씨, 다음 순서 맞으시죠?"
스태프가 무심하게 확인했다.
클립보드를 든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도윤은 고개만 끄덕였다.
말을 아꼈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대기실 반대편에서는 심사위원 관계자와 인사를 나누는 참가자도 있었고,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는 무리도 있었다.
도윤 쪽으로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스무 살, 무명.
3년째 본선 진출조차 못 한 이름.
'또 떨어지겠지.'
도윤은 손끝을 내려다봤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 끝이 낡아 보였다.
연습만큼은 누구보다 많이 했다.
하루 열 시간, 열다섯 시간씩.
밥 먹는 시간도,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건반 앞에 앉았다.
그런데도 결과는 늘 같았다.
"저 사람 아직도 나와요?"
뒤에서 누군가 소곤거렸다.
"작년에도 예선 탈락 아니었나..."
"그, 그러게. 대체 왜 계속 나오는 거지."
낮은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도윤은 못 들은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는 여전히 그 말을 붙잡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순서가 돌아왔다.
이름이 호명되자,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향했다.
무대에 올라 인사를 하고, 앉았다.
의자 높이를 한 번 조정하고, 손목을 가볍게 털었다.
건반에 손을 올리는 순간, 잡음이 사라졌다.
객석의 기침 소리도, 종이 넘기는 소리도, 뒤에서 소곤거리던 말도 전부 사라졌다.
오직 눈앞의 건반만이 남았다.
연주가 시작됐다.
손끝이 건반을 눌렀다.
음이 공기를 갈랐다.
한 음, 두 음, 세 음.
느리게 시작한 선율이 점점 속도를 올렸다.
손가락이 건반 위를 빠르게 오갔다.
땀 한 줄기가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지만, 손끝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곡이 끝났다.
박수는 짧았다.
의례적인, 형식적인 소리였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은 서류를 넘기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다른 한 명은 시계를 확인했다.
결과는 뻔했다.
예선 통과자 명단에 도윤의 이름은 없었다.
명단이 붙은 게시판 앞에 잠시 서 있던 도윤은, 이내 몸을 돌려 대기실로 향했다.
가방을 챙기는 손길에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된 결과였으니까.
좁은 원룸.
집에 돌아온 도윤은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것조차 귀찮게 느껴졌다.
방 한가운데,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방 크기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큰 몸체였다.
영창 업라이트, 2000년식.
건반 몇 개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페달 부분도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채였다.
"오늘도 떨어졌어."
도윤이 피아노 앞에 앉으며 말했다.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대답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15년 전, 도윤이 다섯 살 때 부모님이 사준 피아노였다.
그 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피아노를 만진 적이 없었다.
콩쿠르 무대 위에서도, 연습실에서도, 도윤이 손을 얹는 건 언제나 이 낡은 피아노를 떠올리게 만드는 손끝의 습관이었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좋은 그랜드 피아노가 얼마든지 있는데, 왜 낡은 업라이트만 고집하냐고.
레슨 선생도, 동료 참가자도 몇 번이나 물었다.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 피아노여야만 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차갑고 매끈한 감촉이 손끝에 익숙하게 닿았다.
오늘 연주했던 곡을 다시 짚었다.
느리게, 조심스럽게.
한 음씩 짚어가며, 낮에 무대에서 놓쳤던 부분을 되짚었다.
'네 소리가 제일 좋아.'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연습이 끝난 건 새벽 두 시가 넘어서였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웠고, 가끔 지나가는 차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도윤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깨가 뻐근했다.
목을 좌우로 꺾으며 굳은 근육을 풀었다.
피아노 몸체를 손끝으로 쓸었다.
오래된 나무의 결이 느껴졌다.
매끈한 곳도 있고, 거칠게 갈라진 곳도 있었다.
그런데.
손끝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다.
하지만 손을 떼지 않고 조금 더 힘을 주자, 진동은 더 선명해졌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일정한 박자로, 규칙적으로.
'뭐지?'
도윤은 손을 떼고 눈을 깜빡였다.
피아노는 그저 조용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다시 손을 얹어봤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착각이겠지.'
도윤은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무리한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도윤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들기 직전, 등 뒤에서 낮은 울림이 스쳤다.
아주 작고, 희미한 소리였다.
마치 누군가 숨을 고르는 소리 같았다.
도윤의 눈이 다시 떠졌다.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런데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