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빠, 나 정상이 아니야

5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밤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창밖으로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방 안의 정적을 메우고 있던 그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삑ㅡ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해 현관으로 향했는데, 문을 열자 그곳에는 수아가 서 있었다. 우산도 없이,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입고 있던 얇은 카디건은 이미 살갗에 달라붙어 그녀가 얼마나 오래 비를 맞으며 걸어왔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빗물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눈물이고 어느 것이 빗물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눈동자만이 유난히 붉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수아야, 무슨 일..." 내가 놀라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내 품으로 와락 안겨들었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지만, 곧 두 팔로 그녀를 감쌌다. 젖은 옷 사이로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은 이상하게도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오히려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오빠, 나 진짜 못 견디겠어." 그녀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울먹이며 그렇게 말했다. 어깨가 젖어드는 게 느껴졌는데, 그게 빗물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괜찮아, 천천히 말해." 하고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게 손바닥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는데, 그건 단순한 추위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일단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이 상태로 세워두었다간 감기라도 걸릴 것 같았으니까. "일단 들어가자."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현관 안쪽으로 이끌었고, 그녀는 순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옷장 안에 남아 있던 여벌의 옷을 꺼내 건네고, 그녀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는 부엌으로 가 물을 끓였다. 찻잎을 우려내는 손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건 아마 그녀가 저렇게까지 무너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거다. 평소의 수아는 웃음이 많고, 목소리 끝이 살짝 올라가는 말투로 나를 놀리길 좋아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따뜻한 차를 우려 거실로 나오니, 그녀는 이미 소파 한쪽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 있었다. 갈아입은 옷은 내 것이라 헐렁했고, 그 안에서 그녀는 유난히 작아 보였다. 찻잔을 건네자 그녀는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한참을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굳이 침묵을 깨려 하지 않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만큼 조용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오빠, 나 오늘 또... 만나던 사람한테 거절당했어." 수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찻잔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번엔 진짜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손바닥에 남아 있는 찻잔의 온기보다 그녀의 손이 더 뜨겁게 느껴졌는데, 그건 아마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참아왔는지를 그 열기로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그 사람이 나한테... 넌 대체 뭐가 문제냐고 물었어."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다시 왈칵 쏟아졌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뭐가 문제냐니.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함부로 던진 거지, 하는 생각에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그걸 드러낼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수아야, 그런 말 신경 쓰지 마." 내가 그렇게 다독이자,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이전과는 달랐다. 뭔가 결심을 품은 듯한, 동시에 겁에 질린 듯한 눈빛이었다. "오빠는... 오빠는 알아야 할 것 같아."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손끝으로 무릎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순간 무언가 예감이 스치며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뭘?" 내가 조심스레 되물었지만, 그녀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창밖으로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 짧은 눈동자의 움직임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이 스치고 있는지가 그대로 보였다. "나는..." 그녀가 다시 입을 뗐고, 나는 이번엔 재촉하지 않은 채 그저 기다렸다. 창밖의 빗소리와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리는 정적 속에서, 그녀는 떨리는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쉬고서야 마침내 말을 이었다. "나는 몸이... 남들과 달라." 그녀가 그렇게 운을 뗀 순간, 나는 숨을 죽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로 태어났는데, 그 부분이... 남들보다 훨씬 커. 확대된... 그런 거래, 병원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아졌지만, 나는 그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 순간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빗소리도, 시계 초침 소리도, 심지어 내 심장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듯한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이미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듯 눈동자를 떨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나를 이상하게 봐." 그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이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것 같다고, 괴물 같다고. 다들 그렇게 말하고 떠나갔어."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그렇게 쏟아냈고, 나는 그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말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정작 입 밖으로 꺼낼 말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선을, 얼마나 많은 말들을 혼자 견뎌왔을지 생각하니 목구멍이 뻣뻣하게 굳어오는 것 같았다. "오빠도... 이제 나 이상하게 볼 거지." 그녀가 그렇게 묻는 순간, 나는 입을 열려 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우뚝! 그녀의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동시에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한 서글픈 눈빛으로. 빗소리는 여전히 창밖을 두드리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조차 아득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그녀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어떤 말이든 지금 이 순간에는 다 거짓말처럼 들릴 것 같았고, 어떤 침묵도 그녀에게는 또 하나의 거절로 다가갈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만을 마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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