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빠, 나 정상이 아니야

3화

[그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그 아무도 없음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했다.] 병원 복도는 밤새 켜둔 형광등 때문인지 유독 창백했고, 나는 그 불빛 아래 서서 담당 의사의 설명을 몇 번이나 되짚어 들었다. 단순한 저체온과 탈진이라고, 링거를 맞고 하룻밤 지켜보면 별문제 없을 거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듣는 내내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수아가 그 강가에서 어떤 표정으로 물속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걸 떠올리면 의사의 담담한 목소리조차 믿기지 않았으니까. 다음 날 아침, 병실 창으로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던 무렵, 수아는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떴다. 몇 초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낯선 병실 풍경에 눈동자를 굴리며 "내가... 왜 여기 있어.." 하고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는데, 그 무방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는 마음이 조금 놓이면서도 동시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기억 안 나?" 내가 묻자 그녀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마치 뭔가를 더듬어 찾으려는 듯 시선을 허공에 두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지 이내 시선을 피했다. 그 회피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나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캐물어봐야 그녀가 다시 문을 걸어 잠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대신 나는 병원 앞 죽집에서 사 온 죽 한 그릇을 비닐봉지에서 꺼내 병실 창가 협탁 위에 올려놓았고, 뚜껑을 열자 김이 뽀얗게 올라오는 걸 보며 "먹어, 그래야 퇴원시켜준대." 하고 짐짓 가볍게 말을 건넸다. 목소리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들리도록 애를 썼는데, 정작 숟가락을 건네는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숟가락을 받아 몇 번 뜨는 척했다. 죽을 뜨는 손이 느렸고, 씹는 것도 아니면서 입안에서 오래 머물렀다가 삼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그게 먹는 게 아니라 시간을 버티는 행위처럼 보였다. 결국 반쯤 남은 죽을 협탁 위에 내려놓고 숟가락을 그릇 안에 눕히던 그 손짓이, 오래전 그날의 기억을 불쑥 끌어올렸다. [그해 여름, 매미 울음소리가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던 밤이었다.] 부모님이 명절도 아닌데 며칠씩 집을 비우던 시기였고, 나는 열두 살 무렵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저녁, 현관문을 열자마자 집 안 공기가 이상하게 무겁다는 걸 느꼈는데, 동생의 방문이 안에서 걸어 잠긴 채 몇 시간이나 열리지 않았다. 나는 처음엔 그저 삐졌나 싶어 문을 몇 번 두드리다가 말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 너머로 낮게 눌러 삼키는 울음소리가 간간이 새어 나오는 걸 알아채고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저녁도 거른 채였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그보다 문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더 신경 쓰여서 밥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수아야, 배고프지 않아?" 몇 번이나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고, 나는 그냥 그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다. 거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밤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문이 아주 조금,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틈으로 보인 방 안 풍경은 어렴풋했으나, 이불이 방 한쪽에 뭉쳐져 있었고 거울이 다른 곳으로 돌려져 있었으며, 동생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나를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우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 걸 물어봤자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어린 나이에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냥 옆에 앉아 등을 두드려주었을 뿐이었는데, 그 밤 이후로 수아는 나에게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오빠, 무슨 생각 해?" 병실에서 수아가 묻는 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창밖을 보고 있던 시선을 거둬들이는 데 잠깐의 시간이 걸렸는데, 그 사이 그녀는 이미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짧게 답했지만, 목소리 끝이 조금 어색하게 갈라진 걸 나 자신도 느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또 저 표정이네, 뭔가 있는데 숨기는 표정." 하고 장난스럽게 눙쳤다. 그러고는 죽 그릇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나 이제 다 나았거든? 그러니까 그만 걱정해." 하고 덧붙였는데, 그 익숙한 말투에 나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어련하시겠습니까, 하고 속으로 대꾸하면서도 겉으로는 그저 웃어 보였다. 퇴원 후 며칠이 지나 저녁을 함께 먹기로 한 날, 수아의 회사 동료라는 정연이라는 여자가 반찬거리를 봉투 가득 사 들고 잠깐 들렀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안녕하세요~ 저 정연이에요!" 하고 밝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는데, 정연은 짧은 단발머리에 카디건을 걸친 차림으로, 손짓이 크고 말이 빠른 편이었다. "태민 오빠 얘기 많이 들었어요! 수아가 오빠 자랑을 얼마나 하는데요~ 뭐 요리도 잘하고, 다정하고, 그런 오빠 있으면 나 좀 소개해달라고 노래를 불렀거든요!" 정연이 그렇게 말하며 눈을 반짝이자, 수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 "야, 그런 말을 왜 해.." 하고 팔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두 사람이 부엌에서 부산스럽게 반찬통을 꺼내 늘어놓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도마 위에 파를 썰다가 슬쩍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소리가 오랜만에 진짜처럼 들려서, 나는 저녁을 준비하는 손이 조금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밥솥에서 김이 새어 나오는 소리, 냄비에서 국물이 끓어오르는 소리, 정연이 수아의 회사 이야기를 늘어놓는 목소리가 뒤섞여 부엌을 채우는 동안, 나는 오랜만에 이 집이 원래의 소리를 되찾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연은 저녁을 먹고 커피 한 잔까지 마신 뒤에야 "저 진짜 가야 해요, 내일 출근이라서.."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현관에서 몇 번이나 손을 흔들며 "언니 오빠랑 또 놀러 올게요!" 하고 인사한 뒤 문을 닫고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러나 정연이 돌아간 뒤, 설거지를 하는 수아의 등이 문득 굳어졌다. 물소리가 멈추었고, 그릇을 헹구던 손도 멈췄다. 나는 그 정적이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왜 그런지 곧바로 짐작하지는 못했다. "오빠, 나 요새 또 소개팅 자리 나가야 할 것 같아." 그녀가 등을 돌린 채 그렇게 말했는데,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방금까지 정연 앞에서 밝게 웃던 그 얼굴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엄마가 계속 전화해서... 나도 이제 지쳐." 그 말끝이 물기에 젖어 갈라졌고, 나는 그릇을 닦던 손을 멈춘 채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게 울음을 참는 건지 그냥 물이 차가워서인지, 나는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싱크대 위로 흐르던 물소리만이 그 침묵을 채우고 있었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뭔가 말이 될 것 같은 게 자꾸 올라왔다가, 이내 다시 삼켜졌다. 수아야, 그 소개팅... 정말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거야?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나는 물기 어린 그녀의 손을 향해 수건을 조용히 내밀었을 뿐이었는데, 그녀는 그 수건을 받지 않고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