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수아보다 두 살이 어리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심지어 수아 본인조차도, 나를 한 번도 동생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앞 문방구 아저씨도, 옆집 순영이 아줌마도, 우리 부모님조차도 나를 '태민이 오빠'라고 소개했고, 나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몸이 워낙 일찍부터 컸던 탓인지, 아니면 성격이 유난히 무뚝뚝하고 침착했던 탓인지, 나는 태어날 때부터 손위 형제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호칭이 자리를 잡은 건 초등학교 삼 학년, 수아가 유치원생이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놀이터에서 수아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을 때, 나는 울고 있는 그 애를 등에 업고 집까지 뛰어갔었는데, 그 뒷모습을 본 동네 어른들이 하나같이 나를 보고 "어이구, 오빠가 참 든든하네" 하고 말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전부터였을까. 어쨌든 나는 언제부턴가 수아의 동생이 아니라 오빠로 굳어져 있었고, 수아 역시 그 사실을 한 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채 나를 그렇게 불러왔다. 나이 차이 같은 건, 적어도 우리 둘 사이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였다.
그날 밤, 나는 회사에서 야근을 마치고 돌아와 씻지도 못한 채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넥타이는 이미 목에서 반쯤 풀려 헐렁하게 늘어져 있었고,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였다. 창밖으로는 자정을 넘긴 도시의 불빛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고, 텔레비전에서는 누군가 보다가 끈 채 방치해둔 예능 프로그램의 재방송이 소리도 없이 화면만 흘러가고 있었다. 몸이 축축 늘어져서 이대로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삑ㅡ 삑ㅡ.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하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뻐근하게 저려오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현관까지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수아였다.
"언니 집에 안 갔어?" 나는 습관처럼 물었고, 수아는 대답 없이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코트 자락에서 밤공기의 찬 냄새가 옅게 풍겨왔는데, 그 냄새 사이로 은근하게 섞여 있는 알코올 냄새도 느껴졌다. 화장이 조금 지워져 있었고, 눈 밑이 붉게 부어 있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려고 애쓰는 게 눈에 보였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걸어놓았지만, 그 미소는 마치 억지로 붙여놓은 스티커처럼 어색하게 들떠 있었다. '또 무슨 일이 있었나...' 나는 굳이 캐묻지 않고 그냥 냉장고에서 맥주 두 병을 꺼내 하나를 건넸다.
수아는 소파 끝에 걸터앉아 맥주캔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는데도 그 애는 마시지도 않은 채 그냥 캔을 뱅글뱅글 돌리기만 했다. 나는 텔레비전 소리를 낮춘 채 그 옆에 앉아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우리 사이에는 늘 이런 식의 침묵이 존재했다. 굳이 먼저 캐묻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우리 남매의 오래된 규칙이었으니까. 어릴 때부터 그래왔다. 수아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첫사랑에게 차였을 때도, 대학 입시에 실패했을 때도, 늘 이런 식으로 소파 끝에 앉아 한참을 뜸 들이다가 결국은 스스로 입을 열었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삼키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텔레비전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사실은 옆에 앉은 수아의 숨소리, 손끝의 움직임, 작은 몸의 떨림까지도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오빠." 한참 뒤에 수아가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조심스러웠는데, 나는 그 톤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나, 그동안 아무한테도 말 못 한 얘기가 있는데..."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수아는 맥주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고, 나는 저도 모르게 등을 곧게 세우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는데, 정확히 뭘 걱정하는 건지도 모른 채 나는 그냥 손끝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텔레비전 화면의 색깔이 얼굴에 그대로 어른거렸는데, 그 명멸하는 빛 사이로 수아의 표정이 순간순간 다르게 보였다.
"수아야." 나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뭔데. 말해봐, 나 안 놀라." 어릴 때부터 늘 그렇게 말해왔다. 무슨 얘기든 놀라지 않겠다고, 무슨 얘기든 받아주겠다고.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럴 자신이 있었다. 수아가 고등학교 때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장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울면서 털어놓았을 때도, 대학 시절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고 며칠을 앓아누웠을 때도, 나는 늘 이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결국은 수아의 편이 되어주었다.
수아는 나를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피했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그 짧은 순간, 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스치는 어떤 두려움을 보았는데, 그건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표정이었다. 마치 뭔가를 고백하는 순간, 자신이 가진 유일한 안전망마저 잃게 될까 봐 겁내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손끝이 캔 표면을 꾹 누르는 게 보였고, 캔이 살짝 우그러지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탁.
수아가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소리였다. 그 소리 하나에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니야." 수아는 결국 그렇게 말하며 맥주캔을 완전히 손에서 놓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오빠 얼굴 보고 싶어서 왔어."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그 웃음이 얼마나 얇게 발려 있는지 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눈꼬리가 웃는 모양으로 휘어졌는데도 눈동자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또 도망치는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굳이 붙잡지 않았다. 밀어붙인다고 열릴 문이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몇 년째, 무언가의 문턱 앞에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정확히 뭐가 있는지는 몰랐지만, 수아의 삶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방이 하나 있다는 것쯤은 이미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 방문을 언제, 어떻게 열지는 늘 수아의 몫이었고, 나는 그저 문 앞에 서서 기다려주는 역할을 자처해왔을 뿐이었다.
수아는 십 분쯤 더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동안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음악 소리만 듣고 있었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갈게." 그녀가 신발을 신으며 등을 돌린 채 말했고, 나는 배웅하러 문 앞까지 따라나섰다.
"조심히 가." 나는 그렇게만 말했는데, 문이 닫히는 순간 수아의 어깨가 아주 살짝 떨리는 걸 본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수아의 뒷모습이 복도 조명 아래서 유난히 작아 보였고, 나는 그 모습이 문틈으로 사라질 때까지 문을 완전히 닫지 못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문을 닫고 돌아와 소파에 다시 앉았을 때, 나는 한동안 텔레비전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아가 남기고 간 맥주캔은 절반도 비워지지 않은 채로 식탁 위에 놓여 있었고, 나는 그것을 치우려다 말고 그냥 그 자리에 두었다. 캔 표면에 남은 물방울 자국이 식탁 나무 위로 작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언젠가는 저 문턱을 넘어올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그날 밤 창밖으로 비치는 가로등 불빛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불길한 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휴대폰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수아에게 잘 들어갔냐는 문자 한 통을 보낼까 말까 고민했다. 결국 보내지 못한 채 휴대폰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는데, 그 순간에도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서걱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훗날 내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