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강당에 다시 모인 커플들 앞에 이번엔 다른 사람이 섰다.
올리브빛 피부, 주황색 곱슬머리를 뒤로 묶은 젊은 여자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곧았다. 걸음걸이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오리엔테이션 담당 오미래입니다. 여자가 밝게 웃었다.
웃음이 진짜처럼 자연스러웠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할 거예요. 궁금한 거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세요. 오미래가 손을 흔들었다.
주변에 앉은 다른 커플들이 술렁였다. 몇몇은 안심한 얼굴이었다.
서연이 준호를 팔꿈치로 살짝 찔렀다. 사람 괜찮은 것 같은데. 서연이 작게 말했다.
준호는 대답 없이 오미래를 관찰했다.
시선이 오미래의 손, 어깨, 발끝 순으로 움직였다.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은 대체로 뭔가를 숨기고 있는 법이었다.
이 바닥에서 십 년 넘게 배운 게 그거였다.
먼저 배정 결과를 알려드릴게요. 오미래가 태블릿을 들었다.
화면에 명단이 떴다. 이름들이 빠르게 스크롤됐다.
전원 평민 계급으로 시작합니다. 오미래가 말했다.
전원. 준호가 속으로 되물었다.
예외 없이.
한 명도 빠짐없이.
이상하다.
평민 계급은 지정된 의상과 통제 목걸이를 착용하셔야 합니다. 오미래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얇은 천으로 된 옷과 은색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옷은 몸의 절반도 못 가릴 만큼 짧고 얇았다.
원단이 거의 속이 비쳤다.
이걸 입어야 한다고요. 서연이 손으로 옷을 집어 올렸다.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규칙입니다. 오미래가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규칙이라는 말이 참 편하게 쓰인다. 준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목걸이는 뭐죠. 준호가 물었다.
위치 추적과 상태 확인용이에요. 벗으려고 하면 경보가 울려요. 오미래가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표면이 매끈했다. 잠금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이음새조차 육안으로는 잡히지 않았다.
안전을 위한 조치니까 걱정 마세요. 오미래가 다정하게 덧붙였다.
안전이라는 말이 준호에게는 정반대로 들렸다.
안전을 강조하는 곳일수록 위험한 게 많았다.
부부는 각자 지정된 탈의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서연의 얼굴이 붉었다.
어깨와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목에는 은색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찰칵.
잠기는 소리가 났다.
서연이 몸을 살짝 움츠렸다. 이거 좀 무겁네. 서연이 목을 만졌다.
서연이 목걸이를 만지려 했다. 손끝이 목걸이에 닿는 순간 미약한 진동이 울렸다.
삐빅. [경고: 통제 장치 임의 조작 금지.]
서연의 손이 반사적으로 떨어졌다.
어, 뭐야. 서연이 놀란 얼굴로 준호를 봤다.
놀랐죠? 처음엔 다들 그래요. 오미래가 웃으며 다가왔다.
만지면 다 저래요. 익숙해지실 거예요. 오미래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익숙해진다는 말이 더 무섭게 들렸다.
준호도 같은 옷과 목걸이를 착용했다. 남자용 의상은 그나마 조금 덜 노출됐지만, 목걸이는 동일했다.
옷감이 얇아 바람이 그대로 살을 스쳤다.
준호는 목걸이를 손끝으로 만지며 표면을 살폈다.
작은 홈, 미세한 발광 부분, 그리고 이음새.
기계였다. 그냥 목줄이 아니라 정밀하게 설계된 전자 장치.
준호의 눈이 순간 빛났다.
이거, 회로 기반인데. 준호가 속으로 생각했다.
발광부 위치, 이음새 간격, 진동 반응 시간까지.
전부 어딘가 익숙한 구조였다.
사이버 보안 쪽 일을 오래 했으니까. 이런 장치라면 어디를 봐야 하는지 대략 감이 왔다.
방어 계층이 몇 겹인지, 인증 방식이 뭔지, 물리적으로 뜯어낼 틈이 있는지.
머릿속으로 순서가 자동으로 정리됐다.
다음 안내입니다. 오미래가 태블릿을 넘겼다.
오늘 저녁 첫 점수 과제가 있어요. 통과하면 소량의 점수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오미래가 설명했다.
어떤 과제인데요. 준호가 물었다.
농장 자원봉사예요. 간단해요. 오미래가 웃었다.
위험한 건 없어요. 그냥 일손 보태는 정도예요. 오미래가 덧붙였다.
서연이 안심하는 눈치였다. 농장이라면 위험할 게 없어 보였으니까.
다행이다. 서연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준호는 다른 걸 봤다. 강당 벽에 붙은 규칙 게시판.
큼지막한 안내문 아래, 작은 글씨로 적힌 부속 조항이 있었다.
거의 눈에 안 띄게 작았다.
일반 참가자라면 그냥 지나칠 크기였다.
[특전 조항: 시스템 취약점을 보고한 참가자는 즉시 500점을 획득한다.]
준호의 눈이 그 문구에 멈췄다.
취약점 보고.
500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조항이 있는 걸까.
보통 이런 시스템은 취약점을 숨기려고 하지, 알아서 신고하라고 광고하지 않는다.
준호는 다시 목걸이를 만졌다.
혹시 이 조항이, 자기네 시스템을 테스트하려는 미끼일까.
낚싯대를 던져놓고 누가 무는지 지켜보는 거라면.
아니면 진짜 허점을 찾으면 진짜 보상을 주는 걸까.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확인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직접 파헤쳐보는 것.
서연아. 준호가 서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뭐. 서연이 준호를 돌아봤다.
이 목걸이, 내가 좀 만져봐도 될까. 준호가 물었다.
왜, 위험한 거 아니야. 서연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까 진동 오는 거 봤잖아. 서연이 목을 손으로 감쌌다.
조심할게. 준호가 짧게 답했다.
말은 짧았지만 눈은 이미 목걸이의 이음새를 다시 훑고 있었다.
오미래가 그 대화를 눈치챈 듯 준호를 슬쩍 쳐다봤다.
시선이 스치듯 짧았지만 정확했다.
뭔가 문제 있으세요? 오미래가 웃으며 다가왔다.
아니요, 그냥 목걸이가 좀 답답해서요. 준호가 자연스럽게 넘겼다.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오미래의 눈이 잠시 준호의 손을 봤다. 준호는 그 시선을 느꼈다.
일 초, 아니 반 초쯤.
하지만 분명히 머물렀다.
이 여자, 그냥 신입 관리자가 아니다.
뭔가를 지켜보고 있다.
준호는 손을 슬며시 내렸다.
농장 자원봉사는 오늘 저녁 6시부터입니다. 늦지 않게 와주세요. 오미래가 마무리했다.
다들 서로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얇은 옷차림에 다들 어색한 듯 팔로 몸을 가렸다.
부부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얇은 옷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복도를 걷는 내내 서연은 몇 번이나 어깨를 움츠렸다.
서연이 팔로 몸을 감쌌다. 이 옷, 진짜 불편하다. 서연이 중얼거렸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서연이 침대에 털썩 앉았다.
준호는 침대에 앉아 목걸이의 이음새를 다시 들여다봤다.
손끝으로 표면을 따라가며 홈의 개수를 셌다.
하나, 둘, 셋.
패턴이 있었다.
특전 조항. 500점.
뭔가 이 섬 전체가, 준호가 잘하는 일과 이상하게 맞물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연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이런 사람을 노리고 만든 함정일까.
준호는 목걸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서연이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뭐 좀 보여, 그거.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목걸이 안쪽에서 아주 희미하게 반짝이는 발광점 하나를 발견했다.
방금까지는 없던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