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빠, 왜 이제 왔어요?

4화

그날 밤, 도현이 세 들어 있는 원룸의 창문 밖으로는 여의도의 불빛들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는데, 도로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 불빛이 유리창에 부딪혀 방 안 벽지 위로 노란 얼룩을 그리며 흔들렸고, 그는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옷을 벗다 말고 옆구리에 남은 흉터를 손끝으로 오래 매만지고 있었다. 세로로 길게 그어진 흉터는 손끝에 닿을 때마다 살갗의 감촉이 유독 두꺼워, 마치 다른 사람의 피부를 만지는 듯한 이질감을 안겨주었는데, 파편이 박혔던 자리는 여전히 날씨가 흐린 날마다 뭉근하게 저려왔고, 오늘처럼 긴장이 풀리는 밤에는 그 통증이 더 또렷하게 살아났다. 셔츠를 반쯤 벗은 채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던 도현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흉터로 눈을 내리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복무 마지막 해, 국지적인 사고 현장에서 낙하한 콘크리트 파편에 옆구리와 골반을 크게 다쳤던 그날의 기억이,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지금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 굉음과 함께 시야가 하얗게 번지던 순간, 몸이 붕 뜨는 감각과 동시에 옆구리를 관통하는 듯한 뜨거운 통증, 그리고 이어진 몇 시간의 기억이 뭉텅뭉텅 잘려나간 채로 남아 있었는데, 수술 후 몇 달간 재활을 거치면서도 그는 이 사실을 부대 밖의 누구에게도, 특히 서아에게는 절대 알리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다친 몸으로 돌아가면 그녀가 자신을 동정할 것 같았고, 동정으로 이어진 관계는 결국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스스로도 근거 없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병상에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던 밤마다, 그는 링거 줄이 팔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눈으로 좇으며 그녀가 자신을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고, 그 불안은 밤이 깊어질수록 명치를 꽉 조여왔다. 동시에 그녀가 자신의 상처를 알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두려움과 매일 싸워야 했는데, 두 개의 공포가 번갈아 그를 덮칠 때마다 그는 이불을 움켜쥐고 이를 악물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만큼만 숨을 몰아쉬었다. 잊었을까, 떠날까. 그 두 문장 사이에서 그는 답을 찾지 못한 채 몇 달을 흘려보냈고, 그 모순된 감정 속에서 그가 붙잡을 수 있었던 유일한 실체는, 어머니가 남긴 다이아몬드 반지를 그녀의 손에 끼워주었던 그 여름밤의 기억뿐이었다. 도현은 몸을 일으켜 서랍장 앞에 무릎을 꿇듯 앉으며 서랍을 열었고, 안쪽 깊숙이 밀어두었던 낡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표지는 손에 여러 번 쥐인 탓에 귀퉁이가 닳아 뭉그러져 있었고, 그 안에는 서아와 함께했던 여드레 동안의 짧은 기록들이 볼펜으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첫날 그녀가 웃던 방식—입꼬리보다 눈이 먼저 휘어지던 그 웃음—, 셋째 날 함께 먹었던 떡볶이의 매운맛에 그녀가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모습, 여드레째 되던 날 그녀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던 순간까지. 그는 그 페이지들을 손끝으로 천천히 넘기며, 종이 위에 남은 자신의 필체를 눈으로 따라가다가, 문득 그 위에 오늘 그녀가 쏟아낸 원망의 말들을 되짚어보았다. 열일곱 달 동안 나만 아팠던 거였을까, 라던 그 질문. 서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이 서 있었고, 그 순간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의 눈을 마주 보고만 있었는데, 지금 이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다시 그 말을 떠올리자니 명치가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 질문이 사실은 그가 병상에서 수백 번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질문과 똑같았다는 것을, 그녀는 짐작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나만 아팠던 걸까, 라는 물음을 그는 이미 열일곱 달 전부터 매일 밤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으니까. 내가 왜 말을 못 했을까. 그때 말했더라면 지금 이 방에 이렇게 혼자 앉아 있지 않았을까. 아니, 말했더라면 그녀는 정말 떠났을까.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첩 마지막 장에는 여드레째 밤,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그가 적어두었던 짧은 한 줄이 남아 있었다. 날짜와 함께, 다신 놓지 않겠다는 다짐 비슷한 문장이었는데, 그 글씨를 손끝으로 짚어 내려가던 도현의 눈가가 순간 뜨거워졌다가 이내 다시 식었다. 그는 수첩을 덮지 않고 무릎 위에 펼쳐둔 채, 창밖 불빛이 흐려지는 새벽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바깥에서 이따금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고, 그 소리가 멀어질 때마다 방 안의 정적이 더욱 두드러졌다. 도현은 흉터 위로 손바닥을 가만히 얹은 채, 상처의 결을 따라 손끝을 느리게 움직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미쳤네, 진짜."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이 모든 상황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원망 어린 얼굴로 서 있던 서아를 향한 것인지 그 자신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이제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열일곱 달을 침묵으로 버텨온 대가를 오늘 다 치른 셈이었고, 앞으로는 더 감출 수 있는 여지도, 더 미룰 수 있는 시간도 없다는 걸 그는 몸으로 알고 있었다. 손끝에 남은 흉터의 감촉이, 지금까지의 모든 회피가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낙인처럼 느껴졌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진동이 침대 협탁 위에서 낮게 떨리는 소리를 내며 어두운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고, 도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화면을 확인했다. 발신인은 예전 소속 부대의 상급 지휘관이었고, 화면에 뜬 문자 한 줄이 그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남아 있던 여유마저 지워버렸다. "자네, 예비군 훈련 관련해서 따로 볼일이 있으니 다음 주 중으로 한 번 들르게." 짧은 문장 하나였지만, 도현의 손끝이 반지의 케이스를 쥐던 그대로 멈춰 있었다. 문장 안에 특별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발신인의 이름과 그 짧은 문장이 조합되는 순간, 오래전 파묻어두었던 무언가가 다시 떠오르는 듯한 서늘한 감각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갔다. 그는 화면을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 애썼지만, 문자는 그저 문자일 뿐 아무런 설명도 덧붙여져 있지 않았다. 수첩을 쥔 손과 휴대폰을 쥔 손, 두 손이 동시에 굳은 채로 도현은 오랫동안 어두운 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창밖 불빛이 하나둘 꺼져가는 새벽이 다가오는데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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