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소율의 손을 억지로 붙잡아 앞세운 채 서아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골목 어귀까지 나가서야 발걸음을 늦출 생각이었는데, 도현이 그녀의 팔을 가볍게 붙잡는 순간 발걸음이 그대로 멈춰 섰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도가 예전 그대로여서, 서아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 짧은 접촉 하나에 시간이 통째로 뒤로 밀려나는 것 같았다. 열일곱 달 전, 같은 손이 자신의 손등을 감싸며 "먼저 갈게, 금방 돌아올게" 하고 웃던 그 순간이 눈앞에 겹쳐졌다. 서아는 그 기억을 애써 밀어내며 곧 그 손을 뿌리치고 목소리를 낮췄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소율이 데려다주고 나서."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소율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공기를 눈치챘는지 아무 말 없이 서아의 옷깃을 꼭 붙잡았고, 서아는 그런 소율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만들었다.
결국 두 사람은 소율을 근처 상가의 분식집에 맡겨두었다. 떡볶이 한 그릇을 시켜주며 "언니 금방 올게" 하고 당부하는 서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고, 소율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서아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침 문을 닫아 손님이 없는 어머니 한미경의 꽃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셔터를 반쯤 내린 가게 안, 진열대에 남은 몇 송이 장미가 어두운 조명 아래 유난히 붉게 도드라져 보였다. 시든 잎을 다 정리하지 못한 채 물통에 담겨 있는 꽃들에서는 은은하게 삭은 향이 배어 나왔는데, 서아는 그 익숙한 냄새 속에서 오히려 억눌러온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맡아온 냄새, 엄마의 가게, 자신이 자라난 공간 안에서 하필 이 남자와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 우습고도 서글펐다.
"열일곱 달이야, 도현씨."
서아의 목소리가 가게 안의 정적을 갈랐다.
"열일곱 달 동안 편지 한 장, 전화 한 통 없었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그 분수 앞에 매일 앉아있었던 게 나야, 나만 미친 사람처럼."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다 끝내는 갈라졌다. 서아는 숨을 몰아쉬며 두 손을 꽉 움켜쥐었는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감정이 앞섰다.
"매일 그 자리에 앉아서 뭘 기다렸는지 알아요? 도현씨가 보낸다던 소식, 도현씨가 온다던 그 날. 근데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목이 메어 말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나만 아팠던 거였을까, 도현씨한테는 그냥 지나가는 사이였던 걸까. 그래놓고 이제 와서 웬 태연한 얼굴로."
말을 마친 서아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하게 차올라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도현은 그 원망을 묵묵히 받아내며, 팔짱을 낀 채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조명이 어두운 탓인지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라 할 것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고, 다만 시선만이 서아를 똑바로 향한 채 흔들림이 없었다. 그 여유로운 자세가,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낀 그 태연함이 오히려 서아의 화를 더 부추겼다.
"할 말 없어요?"
서아가 다그치듯 물었다.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현은 낮게 숨을 내쉬고는 짧게 되물었다.
"편지를 받아본 적 있어?"
"뭐?"
서아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반문했다.
"받은 적 있느냐고, 편지를."
그 질문에 서아는 순간 말을 잃었다. 편지, 라는 단어가 낯설게 귓가에 맴돌았다. 받은 적 없다는 사실이 곧 편지가 없었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걸, 그 순간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억울함과 혼란이 뒤섞인 채로 도현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편지를 보냈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머릿속이 뒤엉키는 사이, 도현은 더는 설명하지 않고 다만 낮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게 진심이면, 됐어. 그거면 됐어."
그 말이 서아의 가슴을 이상하게 후려쳤다. 마치 방금 전까지 쏟아낸 원망이 전부 무의미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람을 흔드는 그 특유의 화법, 상대의 물음을 그대로 되짚어 상황을 뒤집어버리는 그 방식이, 서아를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밀어넣었다.
'뭐야, 저 태도는. 나는 지금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은데, 왜 자기가 다 정리한 것처럼 말해.'
서아는 입술을 깨물며 뭐라 쏘아붙이려 했지만, 정작 목구멍에서는 아무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도현의 눈빛이 너무 담담해서, 그 담담함이 오히려 서아를 밀어내는 것 같아서였다.
"……내가 왜 이런 얘기까지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서아가 낮게 중얼거렸다. 자조적인 웃음이 입가에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결국 서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셔터 아래로 몸을 숙여 빠져나가는 그 뒷모습이 다급했는데, 도현은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한동안 문가에 서 있었다. 저녁 골목의 소음,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잠시 가게 안으로 밀려들었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 그는 비로소 벽에 기댔던 몸을 슬며시 앞으로 숙이며 옆구리를 손으로 짚었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통증이 갈비뼈 아래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는 듯, 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숨을 짧게 끊어 내쉬었다. 셔터 틈으로 들어온 저녁 바람이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 사실을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열대 위 장미 한 송이가 그의 손끝에 스쳐 흔들렸다. 붉은 꽃잎이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잠잠해졌고, 도현은 그 꽃을 잠시 바라보다가 낮게 혼잣말을 뱉었다.
"……받았으면, 이러진 않았을 텐데."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셔터 밖까지 닿지 못했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결국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