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노파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주름진 손이 옷깃을 움켜쥐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저 손이 얼마나 많은 세월을 견뎌왔을지 잠시 헛생각을 했다. "두석이는… 그놈들한테 잡혀갔단다. 너를 지키려고 끝까지 버티다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 한복판이 뻐근하게 조여드는 감각을 느꼈는데, 이상한 건 그게 슬픔인지 아니면 원래 이 몸에 남아 있던 감정의 잔재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쿵, 내려앉았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직 이 사람을 진짜 아버지라고 느낄 만큼 이 세계에 있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아프구나.' 속으로 그렇게 곱씹으면서도 나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어디로 데려갔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저는 왜, 이렇게 살아 있는 겁니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이 몸이 겪은 일인지, 내가 새로 겪는 일인지 헷갈릴 정도로 목이 아팠다.
노파는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네가 쓰러진 걸 보고 그놈들이 처음엔 널 데려가려 했는데, 두석이가 몸을 던져 대신 잡혀갔단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나오니까 그놈들도 서둘러 떠났고." 노파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을 보면서, 이 손이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을지 짐작했다. 방 안에는 마른 풀 냄새와 흙벽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창호지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이미 오후로 기울어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조차 감이 없었다. 정신을 잃었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지 상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설명을 들으며 나는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려 애썼다. 남풍상단이라는 세력이 특정한 목적—아마도 이 몸, 강태민이라는 존재—을 노리고 있었고, 강두석은 그 대신 붙잡혀 갔다는 것. 상단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무력을 동원해 사람을 잡아갔다는 게 이상했다. 장사꾼이 사람을 인질로 삼는 경우가 흔하던가. '이 몸에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건가.' 나는 그 의문을 속으로 되뇌면서도 겉으로는 노파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왜… 그놈들이 노릴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노파는 고개를 저으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야 알 도리가 없지. 그냥 두석이가 늘 하던 말이, 네 어미가 죽기 전에 뭔가 특별한 걸 남겼다고 했는데, 그게 뭔지는 나도 몰라."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정보가 이 대화에서 처음 언급되는 순간, 머릿속 깊은 곳에서 희미한 기억의 파편이 꿈틀거렸지만, 명확한 형상을 만들기엔 너무 흐릿했다. 마치 물속에 잠긴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데, 실제로 뻗으면 형체가 흩어지는. 나는 그 잔상을 붙잡으려 애썼지만, 남은 건 희미한 온기의 감각뿐이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으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몸을 일으켜 침상에서 내려서려 했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다시 주저앉을 뻔했다. 근육이 통째로 물처럼 풀려버린 느낌이었다. 노파가 놀라 붙잡으며 만류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힘을 냈다. "지금 쉴 때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쫓아야 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에게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길도 모르고, 싸울 힘도 부족하고, 심지어 이 몸의 진짜 정체도 모르는데 뭘 어쩌겠다는 거지.' 전생에서 나는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칼을 든 상대와 맞선 경험 따위는 당연히 없었고, 있어봤자 술자리에서 시비 붙은 게 전부였다. 그런 내가 무장한 상단을 상대하겠다니, 생각할수록 웃음도 안 나오는 소리였다.
자조적인 생각이 스치는 사이, 눈앞에 다시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정보: 남풍상단 마차의 이동 경로 추적 가능. 조건: 대상 마력의 잔여 흔적 접속.]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되는 거였나.' 이 몸에 깨어난 뒤로 계속 눈앞에 떠오르던 이 창들이, 처음에는 헛것인가 싶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뭔가 체계적인 시스템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게임 인터페이스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이 세계 자체가 가진 어떤 법칙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지금 나에게는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었다.
나는 노파에게 잠시 물러나 있으라 부탁하고는, 방바닥에 남아있는 흙 발자국—아마 습격자들이 남긴 흔적일—으로 다가가 손끝을 가만히 대었다. 발자국은 진흙이 말라붙은 채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유독 깊게 눌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무거운 짐, 혹은 사람을 끌고 간 자국이었을 것이다. 손바닥을 통해 미세한 마력의 잔향이 전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눈앞에 흐릿하게 방향을 나타내는 화살표 같은 감각이 떠올랐다. '이거 완전 내비게이션이잖아.' 나는 신기함과 동시에 약간의 안도를 느꼈지만, 그 감각을 붙잡고 있는 동안 몸에서 급격히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팔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야가 잠깐 흐려지면서 방 안의 형체들이 두 개로 겹쳐 보였다. '역시 공짜는 없다는 건가.' 나는 손을 떼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노파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다시 눕히려 했다. "얘, 코피가…" 노파가 소매로 내 얼굴을 닦으려 했지만, 나는 손등으로 대충 코를 훔치며 웃어넘겼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 죽지는 않습니다." 스스로도 그 말이 얼마나 근거 없는지 알고 있었다.
"애야, 지금 나가면 죽는다. 마을 사람들이 이미 관도 쪽에 사람을 보냈으니 기다려보자." 노파의 만류에 나는 잠시 갈등했다. 무작정 뛰어나가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지만, 아버지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세계에 던져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사람 목숨이 걸린 선택을 해야 하는 건지. 전생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나는 분명 경찰을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경찰도 없고, 119도 없었다. 있는 건 낫을 든 농부와 나이 든 노파, 그리고 내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상한 시스템 창뿐이었다.
그 순간, 창밖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민이 정신 들었단 얘기 들었습니다! 안에 있습니까?" 문이 벌컥 열리며 등장한 이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청년이었는데, 허리춤에 낫을 매단 모습이 마을의 다른 농부인 듯했다.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고, 숨을 헐떡이는 걸 보면 꽤 먼 거리를 뛰어온 모양이었다. 그가 나를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관도 쪽에서 마차 자국을 발견했다. 서쪽 협곡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그쪽엔 아무도 안 사는 폐광 지대야. 거기까지는 위험해서 아무도 못 따라갔어." 청년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단순히 길이 험해서 못 따라간 게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듯한 어조였다.
폐광 지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왜인지 그 말이 단순한 지형 정보가 아니라 뭔가 더 큰 의미를 품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무도 못 들어가는 곳이라면, 거긴 뭔가 숨겨진 게 있다는 뜻이잖아.' 소설이나 게임에서도 그런 곳은 항상 뭔가가 있었다. 폐허, 금지된 구역, 사람들이 꺼리는 장소—그런 곳에 진짜 위험도 있지만, 동시에 진짜 답도 있는 법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를 다잡으며 청년에게 물었다. "그 폐광, 정확히 어느 방향입니까? 제가 직접 가보겠습니다." 노파가 다급하게 만류했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안 된다, 태민아. 넌 아직 몸도 못 가누는데 그런 델 어떻게 가겠다는 거냐." 노파가 내 팔을 붙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 눈빛에는 이미 아들 하나를 잃을 뻔한 사람의 공포가 담겨 있었다. 나는 잠시 그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돌아올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데려올 겁니다." 스스로 뱉은 말인데도 어딘가 낯설게 들렸다. 이 몸의 진짜 아들이라면 이런 순간에 뭐라고 말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시스템 창이 다시 조용히 문장을 띄웠다. [경고: 미지의 지형 진입 시 위험도 상승. 접속 가능한 마력 흔적 다수 감지.] 그 경고를 곁눈질로 확인하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위험한 건 알겠는데, 안 갈 수는 없잖아.' 위험도 상승이라니, 마치 게임 난이도 안내창 같은 문구였다.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는 아직 이 세계의 무게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렇게 생각해야만 버틸 수 있는 건지.
청년이 앞서 걸으며 서쪽을 가리켰고, 나는 그 뒤를 따라 절뚝이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을 뗄 때마다 다리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검붉게 물든 협곡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드러나 보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이 세계가 나에게 던지는 두 번째 시험처럼 느껴졌다. 첫 번째 시험이 이 낯선 몸으로 깨어나 살아남는 것이었다면, 이번엔 그보다 더 노골적인 형태의 시험이었다. 협곡의 그늘은 해가 저물수록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고, 그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