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정신을 차리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감각은 모니터 불빛과 커피 자국이 눌어붙은 키보드, 그리고 심장이 갑자기 쥐어짜이는 듯한 통증이었다. '이번 프로젝트만 끝내면 쉬자'는 다짐을 삼백육십오일째 반복하다가 결국 삼십 대 중반에 사무실 바닥에 쓰러졌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도 믿기 힘들다. 야근이 일상이었고, 주말도 노트북을 켠 채로 흘려보냈고, 건강검진 결과지는 뜯어보지도 않고 서랍 안에 쌓아두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눈앞이 하얘지고, 팀장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고, 그다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한가운데 떠 있었는데, 발밑에 바닥이 있는지도 모른 채 둥둥 떠 있는 감각이 마치 무중력 체험관에 잘못 들어간 것 같아서 나는 헛웃음부터 터뜨렸다. 사방을 둘러봐도 벽이라 할 만한 게 없었고, 위아래를 가늠할 기준조차 없어서 나는 이게 정말 공간인지, 아니면 내 의식이 만들어낸 착시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게 그 흔한 죽음 후의 하얀 방인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오르며 건조한 문장이 줄줄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영혼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잔여 영혼 재배치 절차를 시작합니다.] [배정 가능한 신체: 대현국 적하촌, 강태민 (18세, 농부, 생존 확률 낮음).] 문장 하나하나가 사무적이고 무미건조해서, 나는 이게 저승사자의 말투인지 콜센터 상담원의 말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하다못해 '고객님'이라는 호칭 정도는 붙여줘도 되지 않나 싶었지만, 그런 서비스 정신을 기대하기엔 상대는 이미 너무 사무적이었다.
"저기요, 잠깐만요." 나는 반사적으로 말을 걸었는데, 놀랍게도 창 아래쪽에 새로운 문장이 곧바로 떠올랐다. [질문을 접수했습니다. 답변합니다.] 그 기계적인 응답에 나는 픽 웃으면서도 다급하게 물었다. "이거 지금 저 죽은 거 맞습니까? 그리고 저 몸 뭔가 상태가 안 좋다고 쓰여 있는데, 이거 선택 아니면 강제입니까?" [선택 사항입니다. 단, 응답 대기 시간은 십 초로 제한됩니다.] 십 초. 인생 최대의 선택을 라면 물 끓이는 시간보다 짧게 하라니, 나는 속으로 이 시스템을 만든 존재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손끝—손이 있기는 한 건지도 모르겠지만—을 움직여 다음 창을 확인했다. 이 와중에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생존 확률 낮음'이라는 문구가 계속 맴돌았는데, 마치 중고 거래 게시글에 '하자 있음, 급처'라고 적혀 있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선택 가능한 재능 목록: 1. 괴력 (근력 300% 상승, 단 지능 저하 부작용) 2. 완벽 기억 (모든 정보 기억, 단 감정 표현 불가) 3. 기생충 (숙주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차용, 단 미지의 제약 다수).] 목록을 훑어보면서 나는 실소를 흘렸는데, 이건 마치 편의점 삼각김밥 코너에서 유통기한 지난 것들만 골라놓은 느낌이었다. '괴력은 바보 되는 거고, 완벽 기억은 로봇 되는 거고, 기생충은…' 세 번째 항목을 다시 읽으며 나는 잠깐 이 목록을 만든 존재의 취향을 의심했다. 셀렉션이랍시고 내놓은 게 죄다 결함투성이인 걸 보면, 애초에 이 시스템 자체가 공정한 기회를 주려는 게 아니라 그냥 어떻게든 영혼을 밀어넣는 데만 급급한 게 아닐까 싶었다. 시간이 빠르게 줄어드는 게 느껴졌고, 나는 별다른 확신도 없이 그저 '숙주의 능력을 차용'이라는 문장이 그나마 쓸모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그리고 나머지 둘보다는 최소한 '나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얄팍한 판단으로 손을 뻗어 세 번째 항목을 눌렀다. [재능 '기생충'이 선택되었습니다. 신체 이식을 시작합니다.] 창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방금 내가 뭘 눌렀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이 세계에 첫발을 들이게 되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선택이 끝나자마자 세상이 소용돌이치듯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나는 그 회전 속에서 뭔가 뜨겁고 축축한 것—흙과 땀과 풀냄새가 뒤섞인 감각—이 온몸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갈라진 유리처럼 조각조각 흩어지고, 그 조각들 사이로 낯선 목소리와 낯선 냄새와 낯선 온도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새파란 하늘과 그 위로 겹겹이 늘어선 초록빛 밭이었는데, 논두렁을 따라 심어진 작물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이는 이슬을 튕겨내는 모습이 지나치게 선명해서 순간 현실감이 없었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흙냄새는 사무실 방향제 냄새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진했고,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는 에어컨 소음보다 훨씬 크고 거칠었다. 이게 진짜라면, 나는 정말로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이었다. "태민아! 정신이 드냐?" 걸걸한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고, 나는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흙빛으로 그은 얼굴에 굳은살 박인 손, 허름한 삼베옷을 걸친 중년 사내가 나를 부축한 채 근심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손이 내 어깨를 잡는 힘이 생각보다 억세서, 나는 이 사람이 평생 밭일로 다져진 체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즉시 체감했다. 이 사람이 강두석, 즉 이 몸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머릿속 어딘가에서 흐릿한 기억처럼 흘러나왔지만, 정작 나에게는 그 어떤 실감도 없었다. 서른다섯 먹은 회사원이 하루아침에 열여덟 촌부의 몸을 빌려 어느 낯선 남자를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상황이라니, 이걸 어느 드라마 작가에게 갖다줘도 캐스팅부터 난감해할 것 같았다.
"아…버지." 나는 어색하게 그 단어를 내뱉었는데, 목구멍에서 나온 목소리가 예상보다 훨씬 젊고 가늘어서 스스로도 흠칫했다. '이게 열여덟 살 촌부의 성대인가.' 속으로 감탄인지 자조인지 모를 감상을 하는 사이, 강두석은 내 이마에 손을 짚어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밭일 하다가 갑자기 쓰러지길래 얼마나 놀랐는지. 초록 마법 좀 써봤는데 별 탈은 없더구나." 그의 손바닥에서 미묘하게 따스한 기운이 스며드는 게 느껴졌는데, 그게 방금 그가 언급한 마법의 잔재인 모양이었다. 그가 말한 초록 마법이라는 단어가 머릿속 어딘가의 기억 파편과 맞물리며, 나는 이 세계에 농경에 특화된 마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짧게 이해했다. 대현국, 적하촌, 초록 마법—단편적인 정보들이 조각조각 떠오르는 걸 느끼며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직 낯설어서, 나는 그걸 곱씹으며 '아, 이 세계엔 판타지 요소가 진짜로 존재하는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괜찮습니다. 잠깐 눈앞이 캄캄해져서요." 나는 그렇게 둘러대며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다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발목이 후들거리고 무릎에서 힘이 빠지는 감각이 낯설어서, 나는 이 몸이 얼마나 허약한 상태인지 새삼 깨달았다. '생존 확률 낮음'이라던 그 문구가 괜한 경고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강두석이 놀란 얼굴로 나를 붙잡으며 물었다. "조심해라, 태민아. 그런데…" 그가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들여다보는데, 그 시선이 예사롭지 않아서 나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나는 그 떨림을 감추려 무릎 위에 손을 올려 꾹 눌렀다. '설마 벌써 뭔가 눈치챈 건가.' 나는 속으로 다급하게 변명거리를 찾으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무심한 척 눈을 깜빡였다. 몇 초가 억겁처럼 느껴졌다. 강두석이 낮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눈빛이… 오늘따라 좀 낯설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