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낯선 몸, 다정한 아버지

3화

밭일을 하던 중, 눈앞에 뜬 [미등록 마력 반응 감지]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손끝이 저릿해지는 감각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태연하게 강두석을 향해 물었다. "아버지, 저기 관도 쪽에서 뭔가 소리 들리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이 몸에 들어온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나로서는 이 시스템이라는 것이 대체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 물건인지도 확신이 없었다. 게임을 오래 해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이런 식의 경고창은 대개 튜토리얼용 몹 하나 정도 등장할 때나 뜨는 것이지, 뭔가 진짜 위협이 닥칠 때는 오히려 조용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안일한 판단을 내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강두석의 표정을 보고 곧 깨달았다. 강두석은 낫을 놓고 귀를 기울이더니 미간을 좁혔다. "먼지가 좀 일긴 하는데, 장사꾼 마차인가 보다." 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 흙길 위로 예닐곱 필의 말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눈에 들어왔고, 그 뒤로 검은 갑주를 걸친 사내들이 창을 든 채 달려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갑주 표면에 반사되는 오후의 햇빛이 눈을 찔렀고, 말발굽 소리가 땅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으로 먼저 느껴질 정도였다. '저게 그냥 장사꾼일 리가 없잖아. 장사꾼이 창을 들고 편대로 달려오는 세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속으로 그렇게 확신하는 사이, 강두석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저건… 남풍상단 사병들이다. 저들이 왜 이런 촌구석까지." 그의 목소리에 스며든 긴장감이 나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남풍상단이라는 이름이 이 세계에서 어떤 무게를 지녔는지는 몰랐지만, 온후하기만 하던 강두석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보니 결코 가벼운 이름은 아닌 듯했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딴생각이 새어 나갔다. '전생에서 살 때는 회사 상사가 갑자기 사무실에 들이닥치는 게 최악이었는데, 여기서는 창 든 사병들이 몰려오는구나. 세계관이 바뀌니 스케일도 다르군.' 하지만 그런 자조적인 여유도 오래 가지 못했다. "태민아, 집으로 들어가라. 지금 당장." 강두석이 나를 밀치며 소리쳤지만, 나는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도망칠 방향을 몰랐고, 이 몸의 지리 감각도 절반은 백지였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진짜 강태민이라면 눈을 감고도 뒷산 오솔길을 찾아갈 수 있었겠지만, 내게는 그저 사방이 낯선 흙과 대나무숲의 배경일 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눈앞의 시스템 창은 무심하게 새로운 문장을 띄웠다. [경고: 다수의 적대 개체 접근. 전투 회피를 권장합니다.] '그걸 지금 나보고 알려주면 어쩌라는 건가. 회피할 방법을 같이 알려줘야 하지 않나.'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지만, 이내 창을 든 사내 하나가 밭 울타리를 뛰어넘으며 우리 쪽으로 정확히 달려드는 모습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강두석이 손을 뻗어 초록빛 술법을 일으키자 밭 주변의 넝쿨 줄기들이 갑자기 채찍처럼 늘어나 사내의 발목을 휘감았고, 그 순간 사내가 균형을 잃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이 온후한 아버지가 생각보다 실전에 능하다는 사실에 잠시 감탄했다. 넝쿨 줄기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는 모습은, 게임 속 스킬 이펙트를 실제로 목격하는 듯한 이질감을 주었다. 하지만 감탄은 오래가지 못했다. 뒤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사내가 창을 겨눈 채 다가왔고, 강두석이 그들을 상대하는 사이 나는 얼떨결에 뒤로 물러서다가 발이 삽자루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는 그 짧은 순간, 손끝이 흙바닥을 짚었는데, 손바닥에 스며드는 축축하고 서늘한 흙의 감촉과 함께 눈앞에 낯선 문장이 떠올랐다. [숙주 감지: 지렁이 (개체 다수). 흡수 가능.] '이 상황에 지렁이라니, 시스템 이 자식 유머 감각이 참 독특하군. 목숨이 오가는 판국에 지렁이를 흡수하라니, 이게 무슨 개그 콘텐츠도 아니고.' 나는 이 판국에도 실없는 생각을 흘리면서도, 다급하게 손끝으로 그 문장을 눌렀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지렁이든 뭐든, 살아남는 데 쓸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붙잡아야 했다. 순간 손바닥을 통해 뭔가 미세한 진동이 전해지더니, 흙 속에 있던 지렁이들의 감각—진동을 통한 방향 감지—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처음에는 그저 웅웅거리는 잡음처럼 느껴졌지만, 곧 그것이 하나의 지도처럼 정리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의 방향과 거리가 놀랍도록 선명하게 느껴졌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는데,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로 창끝이 정확히 내려찍히며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흩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창날이 번뜩이는 것을 본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감각이 스쳤다. '살았다.' 안도할 틈도 없이 나는 벌떡 일어나 강두석 쪽으로 뛰었는데, 그가 세 번째 사내의 창을 간신히 막아내며 이를 악무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팔뚝에 새겨진 핏줄이 팽창해 있는 것까지 눈에 들어올 만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아버지!" 나는 소리치며 근처에 있던 삽을 집어 들고 사내의 뒤통수를 향해 무작정 휘둘렀다. 삽날이 갑주에 부딪히며 요란한 금속음을 냈고, 그 반동으로 팔뚝 전체에 저릿한 통증이 퍼졌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손목이 시큰거리는 감각이 뇌까지 전해졌지만, 지금 이 순간 아픔 따위를 따지고 앉아 있을 여유는 없었다. 전생에서 회사 야근 때 손목 나가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절박한 통증이었지만, 그마저도 웃음이 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비교를 하고 있다니, 나라는 인간은 참으로 어쩔 수 없구나 싶었다.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나를 노려보았고, 그 눈빛에 서린 살기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순간 강두석이 재빨리 사내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균형을 무너뜨렸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물러설 곳은 없었다. 그때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내가 마차에서 내려서며 냉랭한 목소리로 외쳤다. "쓸데없이 힘 쓰지 말고 항복해라. 저 아이 하나만 넘기면 나머지는 살려주겠다." 그 목소리는 마치 서류를 읽어 내리는 것처럼 건조하고 사무적이었다. 감정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는 마치 물건을 흥정하듯 그 말을 던졌다. 그 말에 강두석의 눈빛이 흔들렸고, 나는 그 순간 이해했다. '이놈들이 노리는 게 나였구나.' 왜 하필 나인지, 이 육체가 뭔가 특별한 가치를 지녔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상황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강두석이 나를 등 뒤로 밀며 소리쳤다. "태민아, 뒤쪽 대나무숲으로 뛰어라!"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결연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이 사람이, 겨우 며칠 함께 산 아버지라는 사람이, 진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를 지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을 뜨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조차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몸을 돌리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 하나가 정확히 뒤통수를 강타했고,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이며 온몸의 힘이 스르르 빠지는 감각이 밀려왔다. 마치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시야가 흐릿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강두석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 목소리조차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시야 한구석에 흐릿한 문장이 마지막으로 떠올랐다. [경고: 생명력 급감. 의식 소실 임박.] '이거 참, 튜토리얼치고는 난이도가 지나치게 높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끝으로, 나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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