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가 구했으니, 내 거야

5화

액자는 여전히 뒤집힌 채였다. 한도현이 그걸 다시 보려는 듯 손을 뻗었다. 나는 재빨리 그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그가 멈칫했다. 내 심장도 같이 멈칫했다. "별거 아니야." 내가 말했다. "근데 왜 숨겨."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둘러대야 하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았다. 액자 뒷면, 나무틀의 나뭇결까지 눈에 들어올 정도로 시야가 좁아졌다. "소민이랑 나, 그냥 아는 사이야. 그거 옛날 사진이고." "그냥 아는 사이인데 액자에 넣어둬?" 말이 없었다. 그의 눈이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내 손이 아니라 그의 손이. 이상하다.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왜 이 애의 손이 먼저 식는가. 칠 년을 봐온 손인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신경 쓰지 마." 결국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다만 눈빛이 아주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의심이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애써 못 본 척했다. 액자를 슬쩍 서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딸깍,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방 안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 다음 날 아침, 그의 휴대폰이 계속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나는 잠깐 멈췄다. 윤소민. 일곱 통. 한도현은 이불 속에서 그 화면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화면 불빛이 그의 얼굴에 파랗게 어른거렸다. "안 받아?" 내가 물었다. "...할 말 없어요." 그의 대답이 기어들어갔다. 여덟 번째 진동이 울렸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나는 그 휴대폰을 슬쩍 집었다. 그가 놓지 않으려 했지만 힘없이 손이 풀렸다. "제가 가지고 있을게." "...왜요." "연락 오는 거 신경 쓰지 말라고." 그는 잠깐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아니라 포기처럼 보였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휴대폰을 내 주머니에 넣는 동안, 그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들어와 그의 뺨에 얇은 선을 그렸다. 그 선을 오래 보고 있다가, 나는 방문을 조용히 닫았다. *** 담임에게는 이미 전화를 해뒀다. 독감 기운이 있어서 며칠 상담실 옆 보건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부모님과도 통화했다고. 거짓말은 언제나 술술 나왔다. 내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고, 담임은 별다른 의심 없이 알겠다고 했다. 이렇게 쉬운 게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 실제로 한도현의 부모님과는 통화하지 않았다. 그의 휴대폰으로 짧은 문자만 하나 보냈을 뿐이다. - "친구 집에서 며칠 있을게요."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문자를 보낸 지 세 시간이 지나도, 여섯 시간이 지나도 화면은 잠잠했다. 누군가는 이걸 두고 방치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그걸 기회라고 불렀다. "부모님 걱정 안 해?" 내가 넌지시 물었다. "...원래 신경 안 써요." 한도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무표정이 오히려 안심됐다. 외로운 자리일수록 내가 채워 넣기 쉬웠다. 빈 그릇에 물을 채우듯, 그 애의 빈자리마다 내가 스며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날 오후, 그가 처음으로 웃었다. 내가 끓인 랍상소우총 냄새를 맡다가, 문득. "이 냄새, 뭔가 타는 냄새 같아요." "소나무 훈연향이야." "이상한데 좋아요." 작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웃음 하나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일곱 해를 지켜본 얼굴이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찻잔을 건네는 손이 살짝 떨렸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나는 다른 손으로 그 손목을 슬쩍 눌렀다. "더 마실래?" "네." 두 번째 잔을 따르며 생각했다. 이게 시작이다, 나는 생각했다. "학교는... 계속 안 가도 돼요?" 그가 물었다. "금요일에 학급 발표회 있어. 그때까진 쉬어." "발표회요?" "응, 반마다 부스 하나씩 하는 거.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미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가 사람들 앞에 다시 서는 첫 자리. 내가 옆에 있는 채로. 그리고 그 자리에 누가 서 있을지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스에서 뭐 해요?" "차 시음회. 내가 준비할 거야." "지안이가요?" "응. 네가 마셔줬으면 좋겠어서." 그는 잠깐 나를 보더니 시선을 내렸다. 찻잔 속 갈색 수면이 조용히 흔들렸다. *** 밤에 그가 잠든 걸 확인하고 나는 휴대폰을 열었다. 윤소민에게서 온 메시지들이 쭉 떠 있었다. - "도현아 왜 답장 없어" - "학교에 안 나온다는데 무슨 일이야" - "미안해서 그래? 나 진짜 걔한테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읽으면서 손끝이 저절로 차가워졌다. 미안해서 그래, 라는 말이 우스웠다. 칠 년을 이용해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말 한 줄로 끝내려는 게. 나는 화면을 손끝으로 꾹 눌렀다. 누르는 자리마다 지문이 남았다가 사라졌다.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 "지안이는 뭐 알아?" - "걔한테 물어봐도 돼?" 내 이름이 거기 적혀 있는 걸 보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한테 물어보라니. 내가 답을 주면, 그게 진짜인 줄 알고 믿을 텐데.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 알림을 무음으로 바꿨다. 그의 세계에서 그녀의 존재가 조금씩 지워지는 소리, 딸깍. 나쁘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끄고 나서도 나는 한참 그 어둠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 내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 웃고 있었다. *** 다음 날 등굣길, 교문 앞에서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분홍 리본, 밝은 갈색 머리. 윤소민이었다. "지안아." 그녀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 소민아." 나는 태연하게 웃었다. "도현이 소식 좀 알아? 걔 연락이 안 돼서." "글쎄, 나도 몰라." 거짓말이 입에서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그녀의 눈이 나를 살피듯 훑었지만, 그 눈은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 "너 걔랑 좀 친하잖아, 선배잖아." "친하다기보단..." 말을 흐렸다. 그녀는 내 표정을 읽지 못했다.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다. "걱정돼서 그래. 걔 원래 잘 안 아프잖아." "그러게, 나도 좀 놀랐어." 한마디를 더할 때마다 나는 안전선을 하나씩 그었다. 그녀가 넘어오지 못할 정도로만, 하지만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로만.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꼭 말해줘."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걱정이라는 감정을 이렇게 얕게 쓰는 사람도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칠 년치 무게를 가진 애를 손안에서 굴리다가 놓쳐놓고, 이제 와 걱정이라니. "그럴게." 나는 웃으며 돌아섰다. 등 뒤에서 그녀의 시선이 오래도록 느껴졌다. 등이 따가울 정도로. 교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다시 만졌다. 그의 것이었다. 아직도 무음으로 떨고 있을 그 화면을 생각하며,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금요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다시 학교에 나오는 날. 그리고 그녀와 마주칠 날. 내가 그 사이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할지,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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