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가 구했으니, 내 거야

4화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딸깍.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숨을 죽였다. 숨을 죽인다고 심장 소리까지 죽여지는 건 아니었다. 쿵쿵. 귀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문 밖에 있는 사람한테도 다 들릴 것 같았다. "여기 누구 있니." 담임 선생님 목소리였다. 익숙한 저음, 익숙한 말투인데 지금은 그게 왜 이렇게 무섭게 들리는지. 서지안이 내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몸을 틀었다. 손을 놓지 않았다는 게, 이 순간 이상하게 크게 느껴졌다. "저예요, 선생님. 얘 속이 안 좋아서 좀 앉혀뒀어요." 태연했다. 숨소리도 안 흔들렸다. 나는 방금까지 눈물, 콧물 다 쏟아놓은 얼굴로 창가에 붙어 앉아 있었는데, 저 목소리는 어디서 저렇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나오는 건지. "한도현이? 상담실 갔다고 들었는데." 내 이름이 문 밖에서 불리는 순간, 손끝이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들켰나. 아니, 아직 아니야. "상담 선생님이 잠깐 자리 비우셔서요. 여기서 좀 쉬다가 다시 데려가려고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너무 매끄러워서, 저게 진짜 처음 하는 거짓말인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그저 창밖을 보는 척했다. 눈이 아직도 뻑뻑했다. 창밖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운동장, 그냥 나무 몇 그루. 그런데도 그걸 뚫어지게 보고 있어야 했다. 안 그러면 얼굴이 다 무너질 것 같아서. 선생님이 몇 초쯤 우리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몸 안 좋으면 조퇴시켜라. 지안이 네가 좀 챙겨." 문이 다시 닫혔다. 딸깍. 그 소리 한 번에, 온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숨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참았던 게 이렇게 많았나. 가슴이 뻐근했다. 서지안이 내 손을 슬쩍 쥔 채로 웃었다. 웃는 얼굴이 낯설었다. 방금 죽으려던 사람 앞에서 웃을 수 있다니, 이 여자 뭐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표정을 바꿔. 1분 전엔 사람 목숨 하나 붙잡고 있던 얼굴이, 1분 후엔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가자." 짧게 말하고 먼저 일어났다. "어디를요." "내 집." 대답이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물을 말을 잃었다. 집이라니. 그 단어가 이렇게 낯설게 들릴 일인가. *** 걸어가는 내내 손을 놓지 않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내 손이 차가운 건지 그 애 손이 차가운 건지 헷갈렸다. 사람 손이 이렇게 오래 붙어 있어본 적이 있었나. 초등학교 때 말고는. - "고등학교까지 계속 같이 있으면 그때는 사귀어줄게."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다. 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발밑 보도블록 틈에 낀 낙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쓸데없이 그런 것까지 눈에 담기는 걸 보면, 머릿속이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서지안이 뒤를 돌아봤다. "왜." "아니에요." 대답하면서도 손끝이 자꾸 저려왔다. 7년을 믿었던 약속인데, 이제 와서 그게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약속이었나. 아니면 그냥, 어린애의 착각이었나. 그때 그 말을 한 사람도, 지금 이 손을 잡고 있는 사람도 같은 사람인데. 어쩐지 그 사이 시간이 통째로 사라진 것 같았다. 서지안의 방은 학교에서 걸어서 십 분쯤 거리였다. 좁은 골목, 낡은 원룸 건물. 계단은 좁고 어두웠고,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 못 했다. 그냥 앞서 걷는 뒷모습만 보면서 올라갔다. 문을 열자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나무 냄새, 그리고 뭔가 씁쓸한 향. 사람 사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어디 조용한 찻집 같은 냄새였다. "랍상소우총."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 애가 먼저 말했다. "홍차예요?" "응. 마셔볼래." 대답도 안 했는데 벌써 물을 올리고 있었다. 주전자 물 끓는 소리가 방 안에 나직하게 깔렸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 방은 작았다. 책상 하나, 침대 하나, 그리고 벽 한쪽에 걸린 옷들. 전부 검은색이었다. 옷장이 아니라 벽걸이 옷걸이 하나에 다 걸려 있는 걸 보면, 옷이 많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책상 위엔 책 몇 권과 노트, 그리고 작은 액자 하나. 그 액자는 아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 씻어. 초콜릿 자국 남았어." 그러고 보니 아직도 손이 끈적했다. 중앙정원에서 받았던 초콜릿, 윤소민이 준 게 아니라 다른 애들이 나눠준 거였다. 그마저도 이제는 아무 의미 없었다. 손등에 말라붙은 초콜릿 자국을 보고 있자니, 몇 시간 전 일이 다른 사람 일처럼 느껴졌다. 손을 씻고 나오니 후디 하나가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입어. 그 셔츠 땀범벅이야." "괜찮은데요." "안 괜찮아. 냄새 나." 직설적이었다. 망설임 없이 옷을 벗으라는 사람 앞에서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서 있었다. 이 상황에서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그냥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도 헷갈렸다. 결국 등을 돌리고 셔츠를 벗었다. 등 뒤에서 그 애가 시선을 딴 데로 돌려주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후디를 걸치자 목재향이 코끝에 닿았다. 그 애 냄새였다.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손이 벌벌 떨렸는데, 지금은 그 떨림이 조금 잦아들어 있었다. 홍차를 받아 마셨다. 씁쓸하고 훈훈한 냄새가 입안에 퍼졌다. 처음 마셔보는 맛인데, 낯설지 않았다. "왜 저를 구했어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계속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옥상에서부터,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선생님 앞에서 숨죽이고 있던 그 순간에도. 서지안이 잠깐 멈췄다가 컵을 내려놓았다. 찻잔 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냥, 눈에 밟혔어." 너무 간단한 대답이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사람 목숨 하나를 붙잡은 이유가 그렇게 짧은 문장으로 끝나도 되는 건가. "그게 다예요?" "뭘 더 바라는데." 되묻는 말투에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더 캐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방을 둘러보다가 책상 위 작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두 여학생이 나란히 웃고 있는 사진. 한쪽은 낯선 얼굴이었다. 다른 한쪽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분홍 리본, 밝은 갈색 머리. 윤소민이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어깨를 붙이고, 카메라를 향해 편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 사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지안이 액자를 뒤집어 내려놨다. 손이 빨랐다. 너무 빨라서, 오히려 눈에 남았다. "별거 아니야." 목소리가 방금 전보다 한 톤 낮아졌다. 그 순간, 이 여자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처음으로 의심이 들었다. 윤소민을, 언제부터, 어떻게. 그리고 나를, 언제부터, 얼마나. 찻잔을 쥔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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