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저녁의 색이 짙어질수록 방 안의 불빛도 선명해졌고, 그 대비 속에서 나는 내 얼굴이 창에 반사되어 겹쳐 보이는 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표정이 없었다.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없었다.
서윤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애원과 분노가 반쯤 섞인, 도와 달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으려는 그 오기가 실린 목소리. 전화선을 타고 넘어온 그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숨을 참는 것 같기도 했고, 울음을 삼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죽어도 나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그 억센 자존심이 그대로 깔려 있었다.
8년 전, 그 아이가 나를 향해 쏘아붙였던 그 말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지 같은 게 왜 우리 집에 와 있어."
열 살짜리 여자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문장이, 그날 이후로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습게도, 그 아이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삼 초쯤 뒤에 잊어버렸을 거다. 아무 의미도 없이 던진 말이었을 테니. 하지만 나는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순간을 초 단위로 재생할 수 있었다. 정원의 흙냄새, 서윤이 신고 있던 하얀 샌들, 그 애 뒤로 늘어진 장미 덩굴의 그림자까지도.
그때 우리 집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서윤네 저택의 별채에서 거의 반년 가까이 신세를 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고, 어머니는 매일 웃는 얼굴로 서윤의 어머니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 웃음이 얼마나 억지스러웠는지, 나는 어린 나이에도 알 수 있었다. 밥상 앞에서는 항상 감사하다는 말이 반복됐고, 그 말은 언제나 어머니의 목소리를 한 톤 낮추게 만들었다.
나는 그 집 정원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많았는데, 어느 날 그 정원에서 서윤과 마주쳤다.
열 살짜리 나는 그저 반가웠다. 같이 놀 사람이 생겼다는 생각에.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흔들며, 나는 웃는 얼굴로 그 아이에게 다가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만큼 순진한 접근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거지 같은 게, 왜 우리 집에 와 있냐고.
그 말을 내뱉을 때 서윤의 표정에는 악의가 없었다. 그게 더 끔찍했다. 미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말. 그 애에게 나는 정원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그날 밤, 나는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다시는 누구 앞에서도 그런 말을 듣지 않겠다고. 다시는 누구의 별채에서, 누구의 자비 속에서 살지 않겠다고. 이불 속에서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 다짐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그 다짐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 밤을 새워가며 공부했던 시간, 남들이 놀 때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시간, 아버지 회사의 후계자 수업을 견디며 투자 실무에서 실적을 쌓았던 순간들. 그 모든 걸 버텨낸 원동력이 결국 그 한 문장이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우습기도 했다. 서윤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 모욕이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악착같이 살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감사와 복수는 얼마든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오히려 그 두 감정은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것 같기도 했다. 뿌리는 하나인데 가지가 두 갈래로 뻗어 나간 나무처럼.
계획은 단순했다. 서윤을 대중 앞에서 무너뜨리는 것. 재벌 딸이 결혼 상대 앞에서 추태를 부린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 집안의 명성에 흠이 생기고, 서윤의 부모는 지금까지 쌓아온 사업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나에게 매달릴 거라 생각했다. 그 계산은 몇 달에 걸쳐 다듬어진 것이었다. 나는 서윤의 부모가 얼마나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딸의 추문은 곧 사업 파트너들의 신뢰를 잃는 것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약국에서 준비한 건 가벼운 발열제와 홍조 유발 성분이 섞인 약물이었다.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고, 열이 조금 오르고, 정신이 살짝 흐트러지는 정도. 사람들 앞에서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의 약이면 충분했다. 나는 그 약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성분표를 세 번 읊어보고, 담당 직원에게 재차 물어보기까지 했다. 실수가 없어야 했다. 이건 서윤을 다치게 하려는 계획이 아니었으니까. 어디까지나, 무릎을 꿇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오후에 약사와 통화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담당 직원이 실수로 다른 성분의 원료를 조합했다는 것.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몇 배는 강한, 심박수와 체온을 급격히 끌어올릴 수 있는 조합이었다는 것.
전화기를 든 손이 순간 굳었다.
"다시 말해봐요. 뭘 잘못 넣었다고요?"
수화기 너머 약사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그 사과는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리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아주 잠깐 손이 떨렸다.
계획에 없던 감정이었다. 죄책감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았고, 두려움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성적이었다. 그냥 뭔가, 예상하지 못한 톱니바퀴가 어긋난 느낌. 정교하게 짜놓은 시계 속에 모래알 하나가 끼어든 것 같은, 아주 작지만 분명한 이물감.
그래도 나는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서윤은 지금 이 순간 나 말고는 답을 찾을 곳이 없었다. 몸이 아프고, 원인을 모르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아이가 매달릴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건 계획이 어긋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완벽해진 거라고. 원래보다 더 절박한 서윤이라면, 내 조건을 거절할 여유조차 없을 거라고.
다음 날 오후, 병원 근처 카페에서 서윤을 마주 앉혔다.
카페 안은 한산했다. 창가 자리에 먼저 앉아 커피를 시켜놓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을 정확히 맞춰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도 그게 서윤이라는 걸 알았다.
서윤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밤새 열이 왔다 갔다 했는지 눈 밑에 그늘이 짙었다. 입술은 마른 나뭇잎처럼 갈라져 있었고, 걸음걸이도 평소와 달리 조금 휘청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도 나는 웃었다. 얇은 미소를 유지한 채, 나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약속대로 왔네."
"뭘 원하는지 말해."
서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몸이 무너지고 있는 사람치고는 대단한 오기였다. 의자에 앉는 동작조차 힘겨워 보였는데도, 눈빛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그 오기가 마음에 들면서도, 동시에 짜증이 났다. 무너지지 않는 상대는 재미가 없었다. 아니, 재미가 없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무너지지 않는 상대는 나를 자꾸 다른 방향으로 흔들어놓았다.
"해독제는 내가 갖고 있어. 정확히는, 그 성분을 상쇄시킬 수 있는 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고."
"그럼 줘."
"조건이 있어."
서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절박함을 읽어냈다. 정확히 내가 원했던 반응이었다. 손끝으로 컵을 쥐었다가 놓았다가 하는 그 미세한 움직임, 테이블 아래로 살짝 떨리는 무릎. 그런 것들을 나는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사냥감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랑 정식으로 만나. 부모님 앞에서, 정혼자로."
"뭐?"
"내가 네 남편이 되겠다는 거야. 원래 오늘 맞선 자리도 그러라고 만든 자리였잖아. 다를 게 없어."
서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미쳤어. 나한테 이런 짓을 해놓고, 이제는 결혼까지 하자고?"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잔이 테이블 위에서 흔들리며 작게 딸그락 소리를 냈다. 서윤이 놀란 얼굴로 나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들었다가, 이내 다시 내렸다. 그 짧은 순간, 손끝이 허공에서 멈췄다가 무릎 위로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밟혔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생각해보고 연락해. 근데 시간이 많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카페를 나섰다.
문을 나서면서 나는 등 뒤로 서윤의 시선이 느껴졌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시선은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아주 조금의 혼란이 뒤섞인 것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등으로 받으며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걸으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정말로 계획대로 되고 있는 걸까. 서윤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열 살 때도 겁이 없었고, 지금도 겁이 없었다. 열 살 시절, 정원에서 나를 훑어보던 그 눈빛과 방금 카페에서 나를 노려보던 눈빛이 거의 똑같았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그 애의 눈빛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 겁 없는 얼굴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뻐근해지는 걸까.
나는 그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고도 한동안 핸들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낡은 발라드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멜로디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서윤의 창백한 얼굴과, 그 얼굴 뒤에 숨겨진 오기만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몇 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했다. 연락이 올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서윤이라면 최소한 하루는 버티려 할 거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다.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어도 화면은 조용했다.
나는 서재에 앉아 서윤의 부모에 대한 자료를 다시 훑어보았다. 사업 규모, 최근 계약, 은행과의 관계. 모든 것이 예정대로였다. 서윤이 버틴다 해도, 결국 부모가 먼저 나설 거라는 계산도 이미 세워둔 것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껄끄러웠다.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삼켜지지 않는 이물감이었다.
그날 밤늦게,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서재 소파에 반쯔 기대어 앉아 있었다. 화면에 뜬 낯선 번호를 보고 잠깐 망설였지만, 무시할 수 없는 예감이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서윤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는 연락이었다. 발신자는 서윤이 아니었다. 서윤의 어머니, 김미영이었다.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가 거의 울부짖는 수준이었다.
"당신이 우리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애가 숨을 못 쉬어!"
숨을 못 쉰다는 말에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발신자의 목소리가 끊기기 전에 나는 이미 차 키를 손에 쥐고 있었다.
계산이 필요 없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나는 몇 번이나 헛디딜 뻔했다. 신발을 제대로 신었는지도 확인하지 못한 채 계단을 내려갔고,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도착해서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병원까지 가는 동안 나는 계속 시계를 확인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렸고, 초록불로 바뀌는 순간마다 가속페달을 거칠게 밟았다. 도로 위의 불빛들이 눈앞에서 번지듯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이게 뭐지.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이지.
분명, 계획에는 없던 반응이었다.
병원 응급실 표지판이 저 멀리서 붉은빛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나는 액셀을 한 번 더 깊게 밟으며,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아무런 답도 찾지 못한 채 그 불빛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