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저택 생활 이틀째, 나는 아직도 이 집의 복도 구조를 다 외우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외울 마음도 별로 없었다. 방을 몇 개 지나야 계단이 나오는지, 어느 문을 열면 서재고 어느 문을 열면 창고인지, 그런 걸 다 외우는 순간 나는 이 집에 정말로 눌러앉는 거니까. 그건 좀, 억울하잖아.
그런데 방을 나서면 무조건 홍련이 서 있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벽에서 튀어나온 건가 싶을 정도로 정확한 자리에.
"어디 가십니까."
"화장실 가는데요, 이것도 보고해야 합니까."
농담이었는데 홍련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몇 초간 나를 응시하는 그 표정. 이 여자, 유머 코드가 없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쩌겠어, 이런 사람도 있는 거지.
"필요하시면 안내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저 혼자서도 화장실은 찾아갈 수 있어요."
"복도가 세 번 꺾입니다. 초행길에는 헤매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좀 무섭네요."
그녀는 격식체를 한 번도 벗지 않았다. 존댓말인데 명령형 어미가 붙는 이상한 말투. '~하셔야 합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내가 다섯 살짜리 어린애 같았다. 문제는 이 말투가 하루 종일 이어진다는 거다. 밥 먹을 때도, 산책할 때도, 심지어 내가 하품을 할 때도 옆에서 "피로하신 것 같습니다. 쉬셔야 합니다"라는 말이 날아왔다. 나는 이 여자가 혹시 내 숨소리 개수까지 세고 있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서재에서 아버지의 서류를 정리하다가 손을 베였다. 별거 아니었는데, 종이 모서리에 살짝 베인 상처였는데, 피가 방울로 맺히는 정도였는데, 홍련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순식간에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보다 그녀의 발소리가 먼저 들렸다는 게 더 이상했다.
"피가 나셨습니까."
"손톱만큼요. 괜찮아요."
"손을 보여주십시오."
"진짜 별거 아니라니까요……"
그녀는 내 말을 무시하고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그녀의 손이 따뜻하다는 걸 알았다. 항상 표정이 얼음장 같아서 손도 차가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 온도 차이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소하를 부르겠습니다."
"이 정도로 사람을 부르면 소하가 화낼 것 같은데요."
"화내지 않을 겁니다."
대답이 단호했다. 저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소하의 성격을 나보다 잘 아는 것도 아닐 텐데, 아니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러더니 홍련은 자기 소매 안쪽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감쌌다.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붕대를 감는 손이라기보다는, 무슨 유리 조각을 다루는 손 같았다. 격식체와 명령형으로 무장한 사람이, 이렇게 다정한 손짓을 할 수 있다는 게 이상하게 낯설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내 물음에 홍련은 잠깐 굳었다. 손수건을 매던 손가락이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러더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주인의 몸은 저희의 존재 이유입니다."
존재 이유. 또 그 딱딱한 말. 그런데 손수건을 매는 손끝은, 그 말과는 정반대로 부드러웠다. 말과 손이 서로 다른 사람인 것처럼 따로 움직였다.
뭐지, 이 사람. 냉담한 척하면서 이런 짓을 하다니. 나는 손수건에 감긴 손을 괜히 한 번 쥐어봤다. 아프지 않았다.
"이거, 다음에 빨아서 돌려드려야 하나요."
"필요 없습니다. 버리십시오."
"멀쩍이 자수까지 놓인 손수건인데 버리라고요?"
"…원하시면 돌려주셔도 됩니다."
방금 말이 바뀌었다. 나는 그 순간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이 여자, 생각보다 허당인가.
그날 이후로 나는 홍련을 볼 때마다 조금씩 다른 표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무표정 안에 숨은 아주 작은 균열들.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순간,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순간. 아무도 못 알아챌 정도로 작은 것들이었는데, 나는 그걸 수집하듯 눈에 담았다.
·
사흘째 되는 아침, 단희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두드렸다기보다는, 두드리는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노크와 입장 사이에 시간차가 거의 없었다.
"도련님, 이불 정리 좀 도와드릴게요."
"제가 하면 되는데요."
"저희가 있는데 왜 도련님이 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검붉은 기모노 사이로 드러난 어깨선이 눈에 밟혔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그냥 창밖을 봤다. 창밖에는 딱히 볼 것도 없었는데, 그냥 시선 둘 곳이 필요했다.
"저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 아닌데요."
단희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내 셔츠 깃을 정리하는 척하며 목덜미를 스쳤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이게 우연인지 의도한 건지 헷갈릴 정도로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저는 도련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게 제 일이에요."
낮게 웃는 목소리였다. 격식체는 홍련과 비슷했지만, 그 안에 담긴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홍련이 명령이라면, 단희는 유혹이었다. 같은 말투로 이렇게 다른 온도를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제 일이라고 하시니까 좀 서글픈데요. 그냥 좋아서 그런 거면 안 될까요?"
"어머, 그런 것도 궁금하세요?"
그녀는 대답 대신 눈을 살짝 접으며 웃었다. 그 웃음이 진짜인지 연기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구분할 필요도 없는 걸지도.
그날 오전과 낮, 나는 처음으로 이 저택의 방 하나가 얼마나 조용해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됐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다만, 커튼 사이로 들어오던 햇빛이 방 안을 가로지르며 천천히 움직이는 걸 나는 꽤 오래 지켜봤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다만, 단희가 방을 나서면서 남긴 말은 잊히지 않았다.
"도련님은 참, 처음인데도 잘하시네요."
부끄러운 건 잠깐이었고,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이 낯선 세계에서, 적어도 몸으로는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 그거 하나로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그날 저녁 소율의 표정 하나로 완전히 깨졌다.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소율이 창밖을 계속 힐끔거렸다. 처음엔 그냥 습관인가 싶었는데, 힐끔거리는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평소 같으면 나에게 장난을 걸었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찻잔을 든 손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소율,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대답과 동시에 찻잔이 살짝 부딪혀 잔받침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봤다. 대체 뭘 본 거지, 저 눈빛은.
"진짜 아무것도 아닌 거 맞아?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그냥, 착각인 것 같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착각이라고 하기엔 눈동자가 계속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봤다.
창밖에는, 정원 담벼락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사람인지 나무 그늘인지 구분이 안 되는 애매한 형태였는데, 분명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이쪽을, 아니 정확히는 이 거실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사라졌다.
나는 다시 소율을 봤다. 그녀는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떨림은 어디로 숨겼는지, 표정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그게 더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