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적의 히어로, 전리품이 되다

4화

그림자들이 하나둘 어둠에서 걸어 나왔다. 검은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 얼굴은 모두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다. 숫자를 셀 겨를도 없이 계속 늘어났다. 셋, 넷, 다섯··· 어느 순간부터는 세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걷는 그 모습이 마치 훈련된 짐승 떼 같았다. 발소리마저 통일되어 있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마치 하나의 몸을 가진 존재가 여러 개로 쪼개져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게 흑정예구나.' 노강호의 사병 조직, 뉴스에서 몇 번 들어본 이름이었다. 일반 경찰력으로도 감당 못 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정부가 눈감아주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모든 소문이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에서 사실로 확인되고 있었다. '저것들이 전부 나 하나 잡자고 온 건가.' 허탈함마저 느껴졌다. 그들 중 둘이 나를 좌우에서 붙잡았다. 손아귀 힘이 무자비했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이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저항하려 했지만, 팔에 남은 힘이라곤 거의 없었다. '움직여, 제발.' 마음은 소리쳤지만 몸은 응답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조차 내 뜻대로 굽혀지지 않았다. 그 파란 필드, 노강호가 뒤집어씌운 그 능력이 내 몸을 마치 물에 젖은 종이처럼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게 왜 이렇게까지···' 억울함과 공포가 동시에 밀려왔다. 그들은 나를 창고 중앙으로 끌고 갔다. 발이 바닥에 끌리며 시멘트 가루가 부츠 밑창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그곳에는 언제 준비됐는지 모를 강철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등받이가 높고, 팔걸이마다 굵은 결속 장치가 달린 형태였다. 표면에는 스크래치와 얼룩이 남아 있었다. '저거 처음 쓰는 게 아니구나.' 그 생각이 들자 소름이 더 짙게 돋았다. 마치 처형대처럼 서늘한 인상을 풍기는 물건이었다. 조명이 그 의자 하나만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마치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 같은, 그러나 그 어떤 관객도 반가워할 수 없는 조명이었다. "앉혀." 노강호가 짧게 명령했다. 억양에 감정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물건을 옮기라는 지시처럼 무심했다. 두 남자가 나를 의자에 밀어 앉혔다. 등이 강철 등받이에 부딪히며 둔중한 통증이 퍼졌다. 곧바로 손목과 발목에 강철 결속구가 감기며 조여들었다. 철컥, 철컥— 차가운 금속이 살갗에 밀착되는 감각이 소름끼치도록 선명했다. "놔, 이거 놔!" 나는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목청이 찢어질 듯 갈라졌다. 그러나 결속구는 단단히 잠겼고, 몸을 움직일수록 파란 필드가 더 강하게 나를 짓눌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힘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시야 가장자리가 흐릿해지고,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버텨야 해, 여기서 정신 놓으면 진짜 끝이야.' 이를 악물고 눈에 힘을 줬다. 노강호가 의자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키가 큰 데다, 그 눈빛 때문인지 위압감이 몇 배로 부풀려졌다. 그 눈빛에는 승리감도, 감흥도 없었다. 마치 실험이 예상대로 진행된 걸 확인하는 연구자의 눈빛이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의자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발소리가 창고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한 발, 두 발, 세 발. 그 규칙적인 발소리가 마치 초침처럼 시간을 재는 것 같았다. "완벽하군." 그가 중얼거렸다. 혼잣말 같았지만, 분명 내가 듣도록 낸 소리였다. "이걸로 뭘 하려는 거야." 나는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숨이 거칠어져 말끝이 흐트러졌다. 목이 타는 듯 갈증이 났지만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노강호는 잠시 침묵하다 입꼬리를 올렸다. 그 웃음이 웃음이라기보다는 뒤틀린 조소에 가까웠다. "전시품이지." "전시품?"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되묻는 걸 즐기는 듯, 노강호는 여유롭게 손을 들어 손가락을 세웠다. "그래. 강철거인의 사촌 동생이 내 손에 무릎 꿇은 모습을 보여줄 전시품." 그가 손가락으로 내 뺨을 스치듯 만졌다. 손끝이 차가웠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살을 만지는 게 아니라, 진열대 위 물건을 확인하는 손길 같았다. 소름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세상이 알아야지, 완벽한 영웅도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은 산처럼 무거웠다. 마치 이미 그 결과를 확신하고 있는, 실패를 상상조차 하지 않는 자의 여유였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분노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것을 표현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상태로 그의 말을 듣고만 있어야 했다. '최악이군.' 그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뒤틀리듯 요동쳤다. 자존심인지, 아니면 그저 생존 본능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렇게 끝날 순 없어.' 그러나 몸은 여전히 강철 결속구 안에 갇혀 있었고, 파란 필드는 여전히 내 모든 힘을 갈아먹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흑정예 요원들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들의 마스크 너머 눈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존재들 같았다. 그때였다. 창고 저편, 아직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낮고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끼릭··· 끼릭···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였다. 작지만 분명한, 금속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처음엔 그저 창고 어딘가의 기계 소음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점점 일정한 간격으로, 일정한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그 바퀴를 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노강호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바뀌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무심함과는 전혀 다른,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그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보며 낮게 웃었다. "마침 시간이 딱 맞는군." 그가 옆으로 비켜서며 손을 내밀었다. 마치 무대 위 진행자가 다음 순서를 소개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주변 요원들의 시선도 일제히 그 방향으로 쏠렸다. 창고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살얼음판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소개하지."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묘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지금까지 냈던 어떤 톤보다도 생기가 돌았다. "네가 아주 잘 아는 손님이 왔거든." '내가 아는 손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알 만한 사람이 온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온갖 최악의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끼릭··· 끼릭··· 바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형체를 알 수 없었다. 나는 결속당한 목을 억지로 비틀어 그 방향을 바라보려 애썼다. 목 근육이 저항 없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등줄기 전체가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저 소리, 왜 익숙하지.' 기억 어딘가에 걸려 있는, 그러나 좀처럼 잡히지 않는 익숙함이었다. 바퀴가 한 번 더 삐걱이며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저편에서 아주 희미하게, 사람의 실루엣 같은 것이 흔들리며 드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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